만지는 문화로 초대합니다
히로세 고지로 지음, 정숙경 옮김
BF북스·9500원
히로세 고지로 지음, 정숙경 옮김
BF북스·9500원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하다’는 속담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사물의 전체 모습을 보지 못하고, 부분에만 몰두하는 어리석은 이들을 꼬집는 표현이다. 그러나 중학교 때 ‘보는 일반인’에서 시력을 잃은 뒤 ‘만지는 일반인’이 된 히로세 고지로 일본 국립민속박물관 준교수는 이런 인식이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 말한다. 양적인 측면에선 시각으로 얻는 정보가 촉각을 통해 얻는 정보보다 훨씬 많겠지만, 이젠 만져서 아는 세계의 심오함과 만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사물의 온도와 재질 등 촉각 문화가 창조력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대로 변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시각장애인’이 아닌 ‘만지는 일반인’으로 부르는 히로세는 이 책에서 시각장애인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여러 통념들을 유쾌하게 전복한다. 그는 중학교 1학년을 마칠 무렵 시력을 잃었지만,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대학에도 들어갔고 박사학위도 취득했고 취직도 했다”고 말한다. 그는 시각장애인 학교에 들어가 같은 반 여학생에게 연애편지를 쓰면서 점자 쓰기를 배웠고, 고등학교 땐 단거리 육상 선수가 되기도 했다. 대학교 땐 멋을 부리기 위해 장롱의 옷을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꺼내 입다가 가끔 순서를 뒤집어 입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성공한 장애인들에게 붙은 ‘고군분투’와 같은 어구가 나붙는 것이 달갑지 않다고 말한다. 어느 날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던 중 학생들의 질문에 익살스럽게 “그냥 적당히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담당 교사는 아이들에게 “히로세씨는 열심히 노력해 성공한 사람”이라며 노력과 공부를 반복해 강조했다. 이를 듣고 불편했다고 말하는 지은이는 장애인은 다른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여느 사람들처럼 적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인식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지은이가 강조하는 것은 ‘만지는 일반인’들이 ‘만져서 얻는’ 정보의 소중함이다. 지은이는 그동안 촉각을 통한 여러 다양한 전시회를 준비해 국내외에서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한 예가 2006년 3월 열린 ‘만지는 문자, 만지는 세계’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에서 지은이는 맹학교에서 사용하는 주판, 만지는 불상, 모형 신사 등 촉각을 통해 사물을 느끼는 프로그램들을 기획했다. 그는 앞서 코끼리 속담의 예를 들며 “한 부분만을 꼼꼼하고 여유롭게 만져서 획득하는 정보가 갖는 질을 중시할 필요도 있다”고 말한다. 에도 후기에 활약했던 시각장애인 학자 하나와 호키이치는 어느 날 제자들과 <겐지 이야기>에 대해 강의하다 바람에 촛불이 꺼지자 “눈뜬 사람들은 참 불편하겠구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장애에 위축되지 않고 ‘만지는 일반인’으로 삶의 영역을 개척해 온 지은이가 ‘보는 일반인’들에게 던지는 묵직한 질문이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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