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리뷰&프리뷰 정희진의 어떤 메모
<남과 여에 관한 우울하고 슬픈 결론>
잉에 슈테판 지음, 이영희 옮김
새로운 사람들, 19967 이 남자들이란 아인슈타인, 피츠제럴드, 로댕, 톨스토이, 슈만, 마르크스, 릴케, 헤세… 등을 말한다(아, 백인도 공통점이다). “저기… 좀 부탁드립니다. 다른 손님들이(항의가)” 종업원이 주의를 주고 간다. 친구들이 다들 목소리가 큰데다 우리만 떠들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다 하고 싶은 말이 일치할 때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는 경우가 있다. “맞아, 맞아! 너도 봤구나!” 어떤 남성이 자기(?) 책 서문에 “내가 글을 쓸 수 있도록 가사를 도맡아 준 아내에게 감사한다”고 썼다. 거짓말이다. 우리가 ‘아는 한’, 이 지식인 부부는 여성이 똑똑해서 남편 글을 대필하다시피 살아왔다. 그가 “대신 써 준 아내가 고맙다”고 말할 수는 없었겠지만, 상투적인 성별분업 논리로 진실을 입막음하는 방식은 ‘지식인답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 저자가 “내가 책을 쓰는 동안 설거지, 청소, 식사를 도맡아 준 남편에게 감사한다”는 서문을 아직 읽은 적이 없다. 외조든 내조든 모두 이성애 제도의 ‘비리’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본인이 원한 희생, 사랑, ‘자아실현’, 불가피한 선택일지 모르지만, 이는 성차별 체제의 핵심 구조다. 그래도 최소한 빌 클린턴 정도의 태도는 갖춰야 하지 않을까. 빌은 힐러리를 뛰어난 동료로 대하지 “도와줘서 고맙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자기가 아내보다 못하다는 사실만 인정해도 ‘대통령이 된다’. 글은 사회적 산물이지만 쓰는 일은 철저히 개인의 작업이다. 왜 부부, 연인간 대필은 문제가 되지 않는가? 노력도 재능도 없는 사람이 남자라는 사실 + 약간의 간판 + 여성의 헌신으로 출세하고 잘난 척까지 하는 현실. 새삼스럽진 않다. <남과 여에 관한 우울하고 슬픈 결론>은 <재능 있는 여자의 운명>, <천재를 키운 여자들>로도 출간되어 있다. 20대에 읽었을 땐 내용 자체가 충격이었다.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이런 불필요한 결심을 한 기억이 난다. 나는 “유명한 남자의 그늘에 가려진 재능 있는 여자의 운명(부제)”과 무관하게, 유명한 파트너도 없고 재능 있는 여자도 아니어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인류, 특히 핵가족 출현 이후 역사는 주인공 남성을 보조하는 여성 혹은 백설 공주(비장애인)를 돕는 일곱 난쟁이(장애인)가 ‘짝’이 되어 유지되어왔다. 성별 관계에서 이 착취와 보상(에 대한 기대)은 아내다움, 내조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계급, 인종, 성별, 비장애인 중심주의는 모두 신분 제도로서 “돕다”는 틀린 표현이다. 책 내용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성들이 남성을 헌신적으로 사랑하고(혹은 경쟁하고), 남자들은 그녀들의 사랑을 백분 활용하는 이야기다. ‘천재 남성’이 자기 업적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노동과 아이디어를 어떻게 훔치고 억압하고 ‘뒤처리’했는지에 대한 실화다. 특히 밀레바(아인슈타인 첫 부인)는 뛰어난 수학자로 스위스 종합 공대의 홍일점 입학생이었다. 상대성 이론, 광양자 이론, 통일장 이론의 공동 연구자였고, 남편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아인슈타인이 아내와 자녀를 ‘버린 후’ 30여년간 업적 없이 과거의 후광으로 연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학계에서도 정설이다(조숙경, <과학동아> 2002년 5월호 참조). 그렇다고 이들이 파트너를 존중했나? 여성들이 갈구한 사랑을 주었나? 사실이 밝혀질까봐 두려워했고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책에 등장하는 11명 ‘여자의 일생’은 지나친 ‘흥미’로 진이 빠질 지경이다. 인간에 대한 착취가 인류 문명의 기초라는 점은 상식이지만, 그것이 사랑과 가족의 이름으로 벌어질 때 구체적인 개인의 인생은 참혹하다. 하지만 이 책은 여자가 남자 때문에 고통, 가난, 질병으로 죽어서 억울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세상에 억울한 일은 이런 일 말고도 수두룩하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주제는 사회 구성 원리로서 성별 분석이자 관계의 윤리에 관한 질문이다. 문제는, 그래도 되는 사회와 남자다. 프란츠 파농의 “남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는 모든 이들이 하루를 뒤돌아보는 말이어야 한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잉에 슈테판 지음, 이영희 옮김
새로운 사람들, 19967 이 남자들이란 아인슈타인, 피츠제럴드, 로댕, 톨스토이, 슈만, 마르크스, 릴케, 헤세… 등을 말한다(아, 백인도 공통점이다). “저기… 좀 부탁드립니다. 다른 손님들이(항의가)” 종업원이 주의를 주고 간다. 친구들이 다들 목소리가 큰데다 우리만 떠들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다 하고 싶은 말이 일치할 때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는 경우가 있다. “맞아, 맞아! 너도 봤구나!” 어떤 남성이 자기(?) 책 서문에 “내가 글을 쓸 수 있도록 가사를 도맡아 준 아내에게 감사한다”고 썼다. 거짓말이다. 우리가 ‘아는 한’, 이 지식인 부부는 여성이 똑똑해서 남편 글을 대필하다시피 살아왔다. 그가 “대신 써 준 아내가 고맙다”고 말할 수는 없었겠지만, 상투적인 성별분업 논리로 진실을 입막음하는 방식은 ‘지식인답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 저자가 “내가 책을 쓰는 동안 설거지, 청소, 식사를 도맡아 준 남편에게 감사한다”는 서문을 아직 읽은 적이 없다. 외조든 내조든 모두 이성애 제도의 ‘비리’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본인이 원한 희생, 사랑, ‘자아실현’, 불가피한 선택일지 모르지만, 이는 성차별 체제의 핵심 구조다. 그래도 최소한 빌 클린턴 정도의 태도는 갖춰야 하지 않을까. 빌은 힐러리를 뛰어난 동료로 대하지 “도와줘서 고맙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자기가 아내보다 못하다는 사실만 인정해도 ‘대통령이 된다’. 글은 사회적 산물이지만 쓰는 일은 철저히 개인의 작업이다. 왜 부부, 연인간 대필은 문제가 되지 않는가? 노력도 재능도 없는 사람이 남자라는 사실 + 약간의 간판 + 여성의 헌신으로 출세하고 잘난 척까지 하는 현실. 새삼스럽진 않다. <남과 여에 관한 우울하고 슬픈 결론>은 <재능 있는 여자의 운명>, <천재를 키운 여자들>로도 출간되어 있다. 20대에 읽었을 땐 내용 자체가 충격이었다.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이런 불필요한 결심을 한 기억이 난다. 나는 “유명한 남자의 그늘에 가려진 재능 있는 여자의 운명(부제)”과 무관하게, 유명한 파트너도 없고 재능 있는 여자도 아니어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인류, 특히 핵가족 출현 이후 역사는 주인공 남성을 보조하는 여성 혹은 백설 공주(비장애인)를 돕는 일곱 난쟁이(장애인)가 ‘짝’이 되어 유지되어왔다. 성별 관계에서 이 착취와 보상(에 대한 기대)은 아내다움, 내조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계급, 인종, 성별, 비장애인 중심주의는 모두 신분 제도로서 “돕다”는 틀린 표현이다. 책 내용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성들이 남성을 헌신적으로 사랑하고(혹은 경쟁하고), 남자들은 그녀들의 사랑을 백분 활용하는 이야기다. ‘천재 남성’이 자기 업적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노동과 아이디어를 어떻게 훔치고 억압하고 ‘뒤처리’했는지에 대한 실화다. 특히 밀레바(아인슈타인 첫 부인)는 뛰어난 수학자로 스위스 종합 공대의 홍일점 입학생이었다. 상대성 이론, 광양자 이론, 통일장 이론의 공동 연구자였고, 남편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아인슈타인이 아내와 자녀를 ‘버린 후’ 30여년간 업적 없이 과거의 후광으로 연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학계에서도 정설이다(조숙경, <과학동아> 2002년 5월호 참조). 그렇다고 이들이 파트너를 존중했나? 여성들이 갈구한 사랑을 주었나? 사실이 밝혀질까봐 두려워했고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책에 등장하는 11명 ‘여자의 일생’은 지나친 ‘흥미’로 진이 빠질 지경이다. 인간에 대한 착취가 인류 문명의 기초라는 점은 상식이지만, 그것이 사랑과 가족의 이름으로 벌어질 때 구체적인 개인의 인생은 참혹하다. 하지만 이 책은 여자가 남자 때문에 고통, 가난, 질병으로 죽어서 억울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세상에 억울한 일은 이런 일 말고도 수두룩하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주제는 사회 구성 원리로서 성별 분석이자 관계의 윤리에 관한 질문이다. 문제는, 그래도 되는 사회와 남자다. 프란츠 파농의 “남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는 모든 이들이 하루를 뒤돌아보는 말이어야 한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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