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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물고기 밥을 훔친 죄

등록 2013-09-27 20:03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리뷰&프리뷰 정희진의 어떤 메모
<운현궁의 봄>
김동인 지음
일신서적출판사, 1990

동화책과 위인전을 제외하면 내가 생애 처음으로 읽은 책은 <상록수>다. 그것도 학교 공부를 잘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학교 1학년 3월, 국어 교과서에 등장한 첫 필자가 심훈이었다. 모범생이었던 나는 교과서 필자가 쓴 글을 모두 ‘정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세로쓰기에 깨알 반만한 글씨의 삼중당 문고판을 읽었다. 채영신과 박동혁! 감동의 물결이 일렁일 때, 바로 다음에 읽은 <운현궁의 봄>이 내 꿈을 정해주었다. 내용과 주제는 전혀 다른데, 상승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집에 굴러다니던 낡은 책이었는데 다른 기억은 없고 표지에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소재의 실제 운현궁 사진이 생각난다. 이 장편소설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권토중래기다. ‘순수문학파’ 김동인의 묘사 때문에 내가 ‘의식화’가 되었으니, 역시 정치는 문장에 있는 것이지 주장에 있는 게 아닌가 보다.

힘없는 대원군의 처지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당시 세도가 김좌근의 첩 양씨가 선배(?)를 흉내 내는 장면이 나온다. 명종 때 윤원형의 소실 정난정을 따라하는 시반선(施飯船) 행사다.(114~124쪽) 한강 하류에 밥을 쏟아 물고기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다(‘慈善’이라는 표현이 그대로 나온다). 구경 나온 배고픈 백성들에게 “물고기가 밥을 잘 먹는지 강물 속을 굽어보라”고 말한다.

몇몇은 강으로 뛰어든다. 물고기 밥을 훔친 죄로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엉덩이 ‘뼈’가 부서지도록 맞는다. 가족은 그 밥을 “바란 죄”로 오십대씩 태형에 처해진다. 그 장면이 중학교 1학년에겐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나의 정치의식과 공권력에 대한 분노는 그때 정해졌다.

지금은 밥해 먹을 기운도 없는 상록수는커녕 회색도 못되는 인생이지만, 심훈과 김동인 덕분에 내 장래희망은 ‘주님만이 내 거처를 아시는 이름 모를 헌신적인 수녀’가 되는 것이었다. 테레사 수녀 관련 책도 열심히 읽었다. 영어 선생님한테 이런 질문도 해댔다. “수녀는 영어로 시스터인데, 왜 테레사 수녀님은 마더라고 하나요?”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아주 훌륭한 수녀님은 마더라고 한단다.”

나중에 미국 대공황 당시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 위해 남아도는 쌀을 캘리포니아 연안에 버려 푸른 바다가 뿌옇게 될 정도였다는, 자본주의의 모순에 관한 책을 읽었을 때 한강 물속 하얀 쌀밥의 이미지가 또렷이 살아났다.

요지가 한참 늦었는데, 현재 내 고민은 대폭 소박해져서 이 글은 ‘남는 음식’에 관한 것이다. 엄청난 맥락의 차이가 있지만 물고기를 반려동물로 기르는 입장에서는 <운현궁의 봄>의 묘사가 불편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미국 농민의 입장에서는 남는 쌀을 버리는 것이, 배추밭을 갈아엎듯 가격 폭락을 막는 길이다. 이런 상황은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개인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운현궁의 봄>에서 생각 있는 관리라면 쌀의 일부를 숨겼다가 나중에 나눠줄 수도 있고, 태평양이 쌀뜨물이 되도록 하지 말고 수급 법칙이 미치지 않는 아주 먼 지역의 굶는 이들에게 보낼 수도 있다. 어리석은 인간이 만든 어이없는 현실에 대한 대응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때리고’ ‘버리는’ 일 뿐일까?

재활용 사회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의 포스터가 있는데 그 단체를 지지하지만, 볼 때마다 불편하다. “두면 고물, 주면 보물”. 매우 잘못된 말이다. 노동, 특히 대개 여성들이 하는 노동을 무시, 비가시화 하는 말이다.

남에게 줄 선물 고르는 일도 상당한 노동인데 중고품을 나누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대로 기증하는 게 아니다. 정리, 청소, 수선은 필수. 드라이클리닝, 다림질까지. 남은 음식은 그냥 주기 미안해서 새로 음식을 더하기도 한다.

고물이 보물이 되려면 사람의 마음과 일이 필수적이다. 내게 별로 득이 되지 않으면서 “주고 욕먹을” 가능성이 많은 일이다. 그게 귀찮아서 다들 그냥 버리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들에겐 물건을 새로 사는 게 재활용보다 편하다.

자원을 아끼고 나누는 데는, 노동이 요구된다. 나는 이 노동이 자본주의를 구제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몸이 이미 체제다. 변화는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세상을 수선하는 일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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