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리뷰&프리뷰 정희진의 어떤 메모
<태백산맥>
조정래 지음, 한길사, 1989 언제나 ‘이 시대의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읽은 지 20년이 넘었다. 나는 10권 모두 등하굣길 지하철 안에서만 읽었다. 그 외 시간과 장소에서는 읽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더 중요한’ 사회과학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한심한 청춘이었다. 결국 일주일에 한두번씩은 정차역을 지나쳤다. ‘조국과 민중’이 모든 생활을 점령했던 시대에 빨려들듯 읽었지만, 지금 읽어도 일상으로 돌아오기 힘든 작품이다. 이 글의 제목이 <태백산맥>의 어느 부분에 나오는지 찾기 위해 원고지 1만6000장을 다시 읽을 용기는 없다. 당시 격렬했던 감동이 현실인식과 연결되지 못했던, 한국 현대사에 무지했고 치열하지 못했던 나 자신과 마주하고 싶지 않다. 작품과 무관하게 20대가 전혀 그립지 않다. 염상진 대장이 가을 곡창을 바라보며 말한다. “모든 곡식은 오래 씹으면 단맛이 나지요.” 민초를 끔찍이 사랑한 그에게 알곡이 어떤 의미였겠는가. 당시 이 구절을 읽었을 땐 “남자가 쌀을 아네?” 정도였다. 근데 이상하게 종종 생각나는, 생각할수록 매력적인 글귀다. ‘나의 대장 염상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염상진의 아이들은 ‘아부지’를 외치며 매상 굶는다. 다음 끼니가 없고 가을이라 해도 소작농은 보리쌀 한 줌이 아쉽다. 식혜나 약과는 ‘현실의 떡’이다. 낟알을 입 안에 오래 담을 수 있는 만족감을 여러 사람이 나누기 위한, 그 겨울 벌교 벌판의 사회주의. 아는 의사 셋이 같은 주제로 흥분하는 걸 보고 염 대장의 말이 근대과학의 패러다임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우유 성분인 카세인나트륨과 우유를 대립시키는 광고 때문에 “카제인(단백질 화학명)이 우유잖아”, “용각산이 바로 도라지 가루지”, “리튬(조울증 치료제)이 버드나무 잎에서 나는 거거든”. 그들의 요지는 의약품과 자연식품은 다를 바 없다는 것. 결국 같은 성분인데 우유(‘자연’)와 카제인나트륨(‘화학’)의 이미지를 대립시키는 교묘한 광고라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원소 중심의 사고방식은 문자 그대로(‘元素’) 기원과 본질 중심의 사유가 전제되어 있다. 원소는 근대 자연과학의 시작이며 이후 인문 사회에도 적용되어 인과론이 맹위를 떨치게 된 인식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탄수화물, 곡물, 빵은 공통점은 있지만 같지는 않다. 옥수수는 수확 후 바로 쪄야 맛있다. 다른 곡물에 비해 당분에서 전분으로 변화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통밀은 케이크의 원료지만 성분이 같다고 통밀과 케이크가 같은 음식은 아니다. 발효, 가공, 상품화 과정은 인간의 몸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몸 밖의 단맛은 제작이 가능하고 무수히 종류가 많다. 사탕, 과자, 식혜, 약식, 떡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단맛이다. 이에 비해 입안에서 알곡을 오래 씹는 공정은 몸 안에서의 일이다. 맛의 변주는 가공품에 비해 급격하지는 않지만 침의 소화효소가 만들어내는 맛은 사람마다 미세하게 다를 것이다. 몸의 대체 불가능성. 이것은 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연 상태의 음식을 그대로 먹으면 몸이 수용체이자 매개체가 된다. 몸 자체의 역할이 증대된다. 흔히 말하는 자연 복원력. 몸 안에서 통밀과 케이크의 변화 가능성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통밀의 변화는 엄청 무쌍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대량가공식품이 몸의 능력을 퇴화시켰다는 것은 상식이다. 가공하지 않는다면 몸, 인식론 양자 혁명이 가능하다. 원소 중심의 사고는 최초, 순수, 기원, 원조, 원인 등의 언설과 연결된다. 이 단어들은 ‘서구’, ‘주류’, ‘중심’ 등 역사의 시작과 표준을 의미하며 권위를 갖는다. 뒤에 등장하는 것은 짝퉁, 모방, 왜곡이다. 그러나 개별적 몸에서 일어나는 일, 즉 ‘현지’(local) 입안에서 느껴지는 곡식의 단맛은 위계가 없는 공시(共時)의 흔적이다. 여기에 기원은 없다. 원소 중심의 사고에서는 성분 중 원소(기원) 함량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과일즙 10% 함유”) 염상진 대장의 말은 각자의 몸에서 역사 만들기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는 기원의 전파가 아니라 동시적 파생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조정래 지음, 한길사, 1989 언제나 ‘이 시대의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읽은 지 20년이 넘었다. 나는 10권 모두 등하굣길 지하철 안에서만 읽었다. 그 외 시간과 장소에서는 읽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더 중요한’ 사회과학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한심한 청춘이었다. 결국 일주일에 한두번씩은 정차역을 지나쳤다. ‘조국과 민중’이 모든 생활을 점령했던 시대에 빨려들듯 읽었지만, 지금 읽어도 일상으로 돌아오기 힘든 작품이다. 이 글의 제목이 <태백산맥>의 어느 부분에 나오는지 찾기 위해 원고지 1만6000장을 다시 읽을 용기는 없다. 당시 격렬했던 감동이 현실인식과 연결되지 못했던, 한국 현대사에 무지했고 치열하지 못했던 나 자신과 마주하고 싶지 않다. 작품과 무관하게 20대가 전혀 그립지 않다. 염상진 대장이 가을 곡창을 바라보며 말한다. “모든 곡식은 오래 씹으면 단맛이 나지요.” 민초를 끔찍이 사랑한 그에게 알곡이 어떤 의미였겠는가. 당시 이 구절을 읽었을 땐 “남자가 쌀을 아네?” 정도였다. 근데 이상하게 종종 생각나는, 생각할수록 매력적인 글귀다. ‘나의 대장 염상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염상진의 아이들은 ‘아부지’를 외치며 매상 굶는다. 다음 끼니가 없고 가을이라 해도 소작농은 보리쌀 한 줌이 아쉽다. 식혜나 약과는 ‘현실의 떡’이다. 낟알을 입 안에 오래 담을 수 있는 만족감을 여러 사람이 나누기 위한, 그 겨울 벌교 벌판의 사회주의. 아는 의사 셋이 같은 주제로 흥분하는 걸 보고 염 대장의 말이 근대과학의 패러다임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우유 성분인 카세인나트륨과 우유를 대립시키는 광고 때문에 “카제인(단백질 화학명)이 우유잖아”, “용각산이 바로 도라지 가루지”, “리튬(조울증 치료제)이 버드나무 잎에서 나는 거거든”. 그들의 요지는 의약품과 자연식품은 다를 바 없다는 것. 결국 같은 성분인데 우유(‘자연’)와 카제인나트륨(‘화학’)의 이미지를 대립시키는 교묘한 광고라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원소 중심의 사고방식은 문자 그대로(‘元素’) 기원과 본질 중심의 사유가 전제되어 있다. 원소는 근대 자연과학의 시작이며 이후 인문 사회에도 적용되어 인과론이 맹위를 떨치게 된 인식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탄수화물, 곡물, 빵은 공통점은 있지만 같지는 않다. 옥수수는 수확 후 바로 쪄야 맛있다. 다른 곡물에 비해 당분에서 전분으로 변화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통밀은 케이크의 원료지만 성분이 같다고 통밀과 케이크가 같은 음식은 아니다. 발효, 가공, 상품화 과정은 인간의 몸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몸 밖의 단맛은 제작이 가능하고 무수히 종류가 많다. 사탕, 과자, 식혜, 약식, 떡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단맛이다. 이에 비해 입안에서 알곡을 오래 씹는 공정은 몸 안에서의 일이다. 맛의 변주는 가공품에 비해 급격하지는 않지만 침의 소화효소가 만들어내는 맛은 사람마다 미세하게 다를 것이다. 몸의 대체 불가능성. 이것은 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연 상태의 음식을 그대로 먹으면 몸이 수용체이자 매개체가 된다. 몸 자체의 역할이 증대된다. 흔히 말하는 자연 복원력. 몸 안에서 통밀과 케이크의 변화 가능성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통밀의 변화는 엄청 무쌍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대량가공식품이 몸의 능력을 퇴화시켰다는 것은 상식이다. 가공하지 않는다면 몸, 인식론 양자 혁명이 가능하다. 원소 중심의 사고는 최초, 순수, 기원, 원조, 원인 등의 언설과 연결된다. 이 단어들은 ‘서구’, ‘주류’, ‘중심’ 등 역사의 시작과 표준을 의미하며 권위를 갖는다. 뒤에 등장하는 것은 짝퉁, 모방, 왜곡이다. 그러나 개별적 몸에서 일어나는 일, 즉 ‘현지’(local) 입안에서 느껴지는 곡식의 단맛은 위계가 없는 공시(共時)의 흔적이다. 여기에 기원은 없다. 원소 중심의 사고에서는 성분 중 원소(기원) 함량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과일즙 10% 함유”) 염상진 대장의 말은 각자의 몸에서 역사 만들기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는 기원의 전파가 아니라 동시적 파생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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