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리뷰&프리뷰 정희진의 어떤 메모
<거짓의 사람들>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두란노, 1997 국가정보원이 자기 비리를 ‘이석기 사태’로 둔갑시키자 자칭 정치평론가인 친척 어른이 내게 엉뚱한 화풀이다. 그는 국정원을 맹비난하면서 “우리가 70만 대군에 예비군까지 있는데, 겨우 그딴 사람들이 내란을 일으키겠느냐! 이건 국정원이 대한민국을 우습게 본 사건”이라며 ‘날카로운’ 비평을 쏟아냈다. “이 나라를 뭘로 보고!”를 반복하시는 바람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65만은 너무 많다, 소수 정예 강군으로 가야 한다, 북한이 100만이므로 흡수 통일하려면 지금도 모자란다, 여성도 군대 가자, 육군을 줄이려고 해도 미국이 반대한다, 지원병제로 바꿔야 한다…. 군대 전문가는 축구 전문가만큼이나 많다. 하지만 우리의 병력 증감 정책은 ‘국가대계’ 차원이 아니라 출산율과 군복무 단축 선거 공약, 랜드연구소 같은 미국 민간 전문가의 의견 ‘따위’에 좌우된다. 한-미 동맹은 미국 중심의 분업 구조다. 한국은 인력을, 미국은 무기와 전략을 제공한다. 한국(육군)은 ‘팔과 다리’, 미국(공군과 해군)은 ‘눈과 머리’라는 얘기다. 이는 국방 종사자들의 오랜 대미 콤플렉스의 근원이자 육군 입장에서는 사병 감축을 둘러싼 첨예한 이해 갈등 지대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국방부가 ‘육방부’(陸防部)로 불릴 만큼 육군 중심의 ‘후진국형’ 전력 구조에다(육군 81%, 해군 9.8%, 공군 9.2%), 사병 대비 장교 비율이 전세계에서 가장 높다. 사병을 줄이면 장교는 실업자가 된다. 군사 쿠데타 가능성은 없지만, 이들의 고용 안정이 깨지면 ‘군인 노동자’의 시위가 일어날지 모른다. 효율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국방 전문가들은 모병 방식에 대해 현행 징병제 대신 미국처럼 100% 지원병제 실시를 주장한다. 이들과 이유는 다르지만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 중에서도 같은 논리를 제시하는 이들이 있다. 위험한 발상이다. 누가 지원하겠는가. 부유한 고학력 집안의 자녀가? 지원병제는 계급 분업이다. 스콧 펙의 <거짓의 사람들>은 <끝나지 않은 길>과 함께 상담 서적으로 널리 읽히는 책이다. 오늘 주제는 책의 주된 내용은 아니지만, 평화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고 있다. 그는 군대의 존재가 불가피하다면 모든 ‘국민’이 복무하는 국민개병(皆兵), 징병제가 최선이라고 주장한다(여성과 장애인은 배제되지만 이는 다른 차원의 논의다). 미국 정부는 흑인, 여성, 빈곤층, 그 외 다양한 ‘문제’ 집단이 지원병이 됨으로써 세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했다. 원래 지출해야 할 이들에 대한 사회복지 비용 절감, 소외 계층의 애국심 고취, 무엇보다 사회의 일상을 탈(脫)군사화 하는 데 성공했다. 군인이 특정한 계층만으로 구성되고 전문화될수록 그리고 첨단무기가 발달할수록 군대는 사회와 멀어진다. 그들의 어려운 임무와 노동은 은폐되고 존재는 비가시화 된다. 어느 사회나 지원병 제도는 계급화, 인종화 된다. 여성 비율도 높아진다. 말이 ‘지원’이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구조적 징병제다. 우리의 경우 이주노동자나 특정 지역민이 지원한다면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지원병 제도는 전쟁과 군대로 인한 제반 논의가 특정 소수 집단의 문제로 축소되는 체제다. 이에 반해 보편적 의무로 운영되는 징병제는 어쩔 수 없이 전사회적인 관심사가 된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가족들은 이들의 안전을 걱정하고 군사(軍事)가 자신의 문제가 된다. ‘바람직하지 않지만 불가피한 일’은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 좋다는 역설이다.
군대는 중세 시대 용병에서 국민국가의 남성 징병제 그리고 다시 글로벌 기업의 경제 활동으로 변화하고 있다. 전쟁주식회사의 등장이 그것이다. 전문화된 군대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저자는 징병제가 군대의 민영화, 프로페셔널리즘을 피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자 ‘군대로부터 군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344쪽)
평화는 평화로운 상태여서는 안 된다. 공동체의 문제가 공유되고 약자의 고통이 가시화, 공감, 분담되는 ‘시끄러운’ 상황이 평화다. 지원병제는 특수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조용한 무관심을 조성한다. 징병제보다 무서운 것은 그것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두란노, 1997 국가정보원이 자기 비리를 ‘이석기 사태’로 둔갑시키자 자칭 정치평론가인 친척 어른이 내게 엉뚱한 화풀이다. 그는 국정원을 맹비난하면서 “우리가 70만 대군에 예비군까지 있는데, 겨우 그딴 사람들이 내란을 일으키겠느냐! 이건 국정원이 대한민국을 우습게 본 사건”이라며 ‘날카로운’ 비평을 쏟아냈다. “이 나라를 뭘로 보고!”를 반복하시는 바람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65만은 너무 많다, 소수 정예 강군으로 가야 한다, 북한이 100만이므로 흡수 통일하려면 지금도 모자란다, 여성도 군대 가자, 육군을 줄이려고 해도 미국이 반대한다, 지원병제로 바꿔야 한다…. 군대 전문가는 축구 전문가만큼이나 많다. 하지만 우리의 병력 증감 정책은 ‘국가대계’ 차원이 아니라 출산율과 군복무 단축 선거 공약, 랜드연구소 같은 미국 민간 전문가의 의견 ‘따위’에 좌우된다. 한-미 동맹은 미국 중심의 분업 구조다. 한국은 인력을, 미국은 무기와 전략을 제공한다. 한국(육군)은 ‘팔과 다리’, 미국(공군과 해군)은 ‘눈과 머리’라는 얘기다. 이는 국방 종사자들의 오랜 대미 콤플렉스의 근원이자 육군 입장에서는 사병 감축을 둘러싼 첨예한 이해 갈등 지대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국방부가 ‘육방부’(陸防部)로 불릴 만큼 육군 중심의 ‘후진국형’ 전력 구조에다(육군 81%, 해군 9.8%, 공군 9.2%), 사병 대비 장교 비율이 전세계에서 가장 높다. 사병을 줄이면 장교는 실업자가 된다. 군사 쿠데타 가능성은 없지만, 이들의 고용 안정이 깨지면 ‘군인 노동자’의 시위가 일어날지 모른다. 효율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국방 전문가들은 모병 방식에 대해 현행 징병제 대신 미국처럼 100% 지원병제 실시를 주장한다. 이들과 이유는 다르지만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 중에서도 같은 논리를 제시하는 이들이 있다. 위험한 발상이다. 누가 지원하겠는가. 부유한 고학력 집안의 자녀가? 지원병제는 계급 분업이다. 스콧 펙의 <거짓의 사람들>은 <끝나지 않은 길>과 함께 상담 서적으로 널리 읽히는 책이다. 오늘 주제는 책의 주된 내용은 아니지만, 평화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고 있다. 그는 군대의 존재가 불가피하다면 모든 ‘국민’이 복무하는 국민개병(皆兵), 징병제가 최선이라고 주장한다(여성과 장애인은 배제되지만 이는 다른 차원의 논의다). 미국 정부는 흑인, 여성, 빈곤층, 그 외 다양한 ‘문제’ 집단이 지원병이 됨으로써 세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했다. 원래 지출해야 할 이들에 대한 사회복지 비용 절감, 소외 계층의 애국심 고취, 무엇보다 사회의 일상을 탈(脫)군사화 하는 데 성공했다. 군인이 특정한 계층만으로 구성되고 전문화될수록 그리고 첨단무기가 발달할수록 군대는 사회와 멀어진다. 그들의 어려운 임무와 노동은 은폐되고 존재는 비가시화 된다. 어느 사회나 지원병 제도는 계급화, 인종화 된다. 여성 비율도 높아진다. 말이 ‘지원’이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구조적 징병제다. 우리의 경우 이주노동자나 특정 지역민이 지원한다면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지원병 제도는 전쟁과 군대로 인한 제반 논의가 특정 소수 집단의 문제로 축소되는 체제다. 이에 반해 보편적 의무로 운영되는 징병제는 어쩔 수 없이 전사회적인 관심사가 된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가족들은 이들의 안전을 걱정하고 군사(軍事)가 자신의 문제가 된다. ‘바람직하지 않지만 불가피한 일’은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 좋다는 역설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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