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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한겨레 프리즘] 금지된 ‘사랑’ / 이유진

등록 2014-04-06 18:47

이유진 문화부 기자
이유진 문화부 기자
미셸 푸코는 사회가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제한한다고 했다. 금지, 분할, 배척의 과정을 통해서다. 일단, 질문. ‘성별이 같은 친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형제간에 이해하는 마음’, ‘이웃 아주머니들끼리 돕는 마음’을 뭐라고 할까? 우정, 우애, 형제애, 사랑 모두 정답이다. 또 다른 정답이 있다. 이 모두가 ‘동성애’다. 정말이다. 6일 현재, 국립국어원 누리집 표준국어대사전 뜻풀이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몇달 전, 국립국어원은 표준국어대사전의 ‘사랑’에 대한 네번째 뜻풀이를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에서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바꿨다. 성중립적이던 사랑의 정의를 이성애 중심으로 제한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사전상 사람에 대한 사랑을 이르는 뜻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그런데 ‘동성애’의 뜻풀이를 찾아보면, ‘동성 간의 사랑. 또는 동성에 대한 사랑’이라고 돼 있다. 그 결과, 사전상 ‘동성애’는 동성 간의 연애나 애정과 관련된 뜻이 아니라 ‘동성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동성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사랑의 뜻풀이 변경에 대해 국립국어원 쪽은 “(연애 감정과 관련된) 사랑이란 말의 전형적인 쓰임이 나타나지 않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수용했다”고 밝혔다. 역시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전형’은 ‘기준이 되는 형’, ‘같은 부류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본보기’ 등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 기준이 되는 연애나 사랑이란 게 있기나 한 걸까? 모든 사람의 본보기가 되는 애인이 대체 누구인가? 사랑이란 말에서 배척당하는 바람에 이제 성소수자들은 사랑 고백을 할 때 ‘네모네모한다’, ‘방울방울한다’ 같은 말을 만들어 써야 할 판이다.

기호 언어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언어는 파시스트”라고 했다. 언어의 정치성을 연구해온 학자들은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기성 권력과 공범자가 돼 소수를 외면하고 차별하는 다수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런 용어를 저항 없이 지나칠 때 그 단어를 태생시킨 거대한 차별구조에 편입되고 편견을 확산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는 것이다.(김준형·윤상헌, <언어의 배반>)

국립국어원이 그간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민원에 무척 시달렸다고 하니, 고단함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다만, 차별과 소외가 없는 다원적인 언어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윤리헌장의 사문화가 안타까울 뿐이다. 국립국어원도 언어가 가진 권력의 효과를 잘 알고 있다. 이곳에서 낸 한 연구보고서를 보면, ‘계집애’는 여성 비하, ‘미망인’은 여성 차별적, ‘귀머거리·벙어리·절름발이’는 장애인 비하, ‘검둥이·혼혈’은 인종차별 및 비하이기 때문에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모두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다. 낮잡아 이르거나 차별이 있는 말이라도 실제 사회에서 쓰임이 있기에 삭제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문제가 있는 단어들도 현실에서 쓰인다며 사전에 등재하는데, 버젓이 존재하는 성소수자들의 사랑만 금지하고 삭제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동성애라는 낱말까지 사전에서 배척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지만, 그동안 도움을 많이 받아온 이용자로서 진심을 담아 드리는 충언이다. 다원적인 언어정책을 펼치겠다는 맨 처음 원칙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이유진 문화부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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