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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폭력은 계속된다

등록 2014-05-11 21:07수정 2014-05-11 22:08

세월호 참사의 절망 속에 우리가 본 희망은 같이 아파하고 위로하고 분노하는 보통사람들의 존재뿐이었다. 11일 오후 서울시청 앞 ‘세월호 침몰사고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달린 노란 리본 사이로 지친 자원봉사 학생을 다독이는 친구의 모습이 보인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세월호 참사의 절망 속에 우리가 본 희망은 같이 아파하고 위로하고 분노하는 보통사람들의 존재뿐이었다. 11일 오후 서울시청 앞 ‘세월호 침몰사고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달린 노란 리본 사이로 지친 자원봉사 학생을 다독이는 친구의 모습이 보인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세월호 참사 특별기고] 김진석 교수
세월호 침몰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팬티만 걸친 선장과 사복으로 바꿔입은 15명 선박직 선원들이 승객을 버리고 승객인 양 먼저 구조된 것을 보면서, 사람들 마음은 침몰했다. 언젠가는 사고가 날 수 밖에 없게끔, 선박회사와 선박조합 그리고 관리기관들의 비리가 상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고는, 사회는 또 침몰했다. 그리고 구조 과정에서 국가가 얼마나 무능하고 무책임한지를 바라보면서, 국민들은 국가라는 배가 또 침몰하는 경험을 했다. 세월호 침몰과 구조 실패는 한국인의 트라우마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희생자들의 고통에 미치지 못할 글을 쓰는 일은 괴롭다. 아무 말 없이 반성하고 애도해야 마땅하지만, 평소 글을 써오던 책임을 회피하기도 어려워, 쓴다. 무책임한 선장을 비롯하여 선박회사의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하겠지만, 개인의 악행에 집중할 경우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이제까지 한국사회는 사고와 재난을 그저 현대 사회에서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부수적 상처 또는 기껏해야 성장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수업료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나 4.16 참사는 더 이상 착각하지 말라며 우리 머리를 때린다. 흔히 말하는 교통사고조차 그저 우연적 사고가 아니다. 개인의 직접적인 실수나 우연으로 생기는 것을 제외하면, 교통사고도 교통을 포함한 사회시스템의 경직성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재난이다. 자살도 ‘사고사(死)’로 집계되지만, 실제로는 사회가 내부에서 생산한 재난의 성격을 띠며, 심지어 사회적 범죄의 결과이기도 하다. 많은 사고가 사회적 인재이거나 범죄인 셈이다.

물론 기술과 기계의 역할이 커진 사회에서는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비교적 ‘정상적인 사고’들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면 많은 사고는, 그때까지 숨겨졌던 부실·부패·갈등들을 드러내면서, 사회적 재난과 범죄의 성격을 띤다. 안전을 무시하며 증축하는 것도 모자라 상습 과적을 속이며 부당 수익을 챙기는 데 선박회사·선박조합·해경·해수부가 직간접으로 가담했다면, 참사는 이미 ‘사회 내부에서’ 키워지고 숙성된 것이며 사회가 생산한 재난과 범죄의 성격을 띤다. 구조가 긴박하게 이루어져야 할 순간에 한참 후에나 있을 인양 작업에 필요한 대형크레인을 불러다놓는 일도 무능에 그치지 않고 구조를 방해한 끔찍한 직무유기다.

역사를 보자. 근대 이전에는 그저 사회 밖에서 일어나는 우연적 사고와 자연 재난들로 여겨졌던 것들이 근대 이후에는 점점 정부가 ‘사회 내부에서’ 통제해야 할 재난으로 통합되었다. 19세기 이후 특히 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정부들의 통치는 개인들이 자유를 모험하도록 적극 권장하면서도, 그로부터 ‘사회적 위험’이 생긴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했다. 왜냐하면 각자 합리적으로 자유를 추구한다는 개인들은 동시에 이익을 이기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과정에서 많건 적건 사회적 위험과 사회적 악을 생산하는 데 연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자유 때문에 생기는 위험을 안전이라는 틀에서 통제하는 일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 이전에, 통치의 기본이었다.

참사보도를 밀어낸 자리에
다시 밀려온 게 뭔가 보자
‘아무 일 없다는 듯 즐거운’
연예 및 스포츠 뉴스
미친 듯 대출을 권하는 광고
그렇다
멀쩡한 듯한 일상에서도
사람들은 여러 폭력에 시달린다
범죄적 사고를 당하지 않으면
폭력적 일상에 시달려라?
이럴 수는 없다!

19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된 복지국가 체제도 다름 아니라 바로 이 자유와 위험을 안전의 틀 안에서 관리하려는 시도의 한 형태였으며, 따라서 그것도 보수와 진보의 이념 차이 이전에 통치의 기본 과제였다. 다만 초기 복지국가들은 정책을 통해 국민의 삶이 직면하는 여러 불행과 사고를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 점에서 다소 낙관적이었다. 그후 20세기 후반에 초기 복지국가 체제가 흔들릴 때도 재정적 부담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복지와 재정, 그리고 세대들의 고용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위험’으로 등장했고, 초기 복지국가 체제는 그것을 더 이상 해결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복지와 안전을 보장할 때, 비용이 커지며 재정이 흔들리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복지와 안전을 축소할 핑계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바로 그것이 정부가 더 복잡한 안전의 틀 안에서 직면해야 할 새로운 ‘사회적 위험’이다. 정부와 지도자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어도 또는 아무리 말이 거창해도, 복지와 안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무능한 것이다. 그리고 정부의 악 가운데 무능이 최악이다.

이 정부는 말로만 ‘안전’을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위험을 더 유발하는 짓을 했다. 대통령은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적 안전을 군사 안보에 국한시키는 태도를 보였고, 군사 안보만 신성한 영역으로 여기며 국민의 안전은 무시하는 장군출신들을 중용했다. 결국 청와대안보실장은 ‘청와대는 사회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무책임한 발언을 하게 된다. 재난에 대한 책임과 매뉴얼을 모호하게 규정한 정부의 전체적 무능이, 안전/안보를 지나치게 군사적 문제로만 파악한 지도자의 무능과 결합한 것이다. 물론 군사 안보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조차 사회적 안전과 뗄 수 없으며, 이것의 일부이다. 미국에서 카트리나 재난이 발생했을 때, 현장에서 재난을 통제한 책임자도 장군이었다. 오히려 국방 영역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국민안전의 관점에서 시급하게 개혁과 개조가 필요한 대상이건만, 이 정부뿐 아니라 지난 정부들 모두 말로만 꺼내놓고 실제로는 미루거나 폐기했다. 그 동안 군에서 일어나는 사고와 희생에 대해 장군들은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능하게 행동했는가! 안전이 확보되지 못한 군대는 국민의 신뢰를 받지도 못하고 그 자체로도 부실한 조직으로 남을 것이다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의 대통령은 저절로 무책임한 선장의 모습과 겹쳐졌다. 물론 제대로 된 사과는 중요하지만, 사과가 대통령의 직무는 아니다. 오히려 사과 논의 때문에 안전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일에 대한 논의가 무시되었다. 대통령의 사과 한 마디가 ‘성은이 망극한’ 통치행위인 것처럼 여겨지거나 거꾸로 그에 대한 실망이 ‘물러나라’는 극단적 분노로 표출되는 이유는, 대통령에게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들먹거리기만 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장관들이 대통령 앞에서 착한 초등학생처럼 받아쓰기를 하는 한, 그런 장관들 아래 고위관료들도 찌질한 눈치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는 새로 안전 담당 정부부처를 만들어도 쓸모없을 것이다. 이번 참사에서 드러났듯이 현장 책임자가 재난을 통제할 권한을 가져야 하는데, 권한과 권력이 제도적으로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쏠려있는 한, 장관이나 현장공무원에게 권한을 위임하겠다는 혹은 위임하자는 어떤 말도 부질없다. 또 권한이 없는 대리총리는 쓸 데도 없을 뿐 아니라 마치 대통령이 정부 책임을 초월하는 것처럼 행동하게 한다. 허수아비 총리제를 폐지하자. 또는 최소한 프랑스처럼, 총리가 내각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내각책임제의 도입을 절박하게 검토하자. 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의 대통령보고 ‘그만두라’ 말하고 싶은 마음이 나도 굴뚝같지만, ‘하야’를 입에 올리고 싶지는 않다. 현재 대통령중심제에서는 ‘그냥 하야하는 것’은 시스템을 혼란에 빠지게 할 위험이 크다. 우리 국민이 정말 정부에게 강한 책임을 지게 만들려면, 내각책임제의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물론 오로지 정부만 실패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우리 스스로 책임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시민들의 책임있는 행동은 그저 책임윤리에 호소함으로써 얻어지기는 힘들다. 이미 사고와 재난의 위험이 높은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의 윤리는 ‘사회적 위험’에 반응하는 변수나 결과에 가깝다. 우선적인 제도적 과제는 모든 조직에서 권한이 큰 사람에게 먼저 안전에 대한 책임을 지우고,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 꼭 처벌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우리가 뭔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렇게 하자’는 말도 공허할 수 있다. 그리고 범죄적 사고들이 주위에서 계속 터지는 한, ‘명복을 빈다’는 말도 빈 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자, 참사보도를 밀어낸 자리에 다시 밀려온 게 뭔가 보자. ‘아무 일 없다는 듯 즐거운’ 연예 및 스포츠 뉴스, 과장된 화사함과 달콤함으로 범벅이 된 광고, 미친 듯 대출을 권하는 광고. 그렇다, 멀쩡한 듯한 일상에서도 사람들은 여러 폭력에 시달린다. 범죄적 사고를 당하지 않으면, 폭력적 일상에 시달려라? 이럴 수는 없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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