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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박래군이 그립다

등록 2015-07-23 19:04수정 2015-07-23 21:02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영혼의 자서전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열린책들 펴냄(2009)

4·16인권실태조사단이 작성한 <4·16인권 실태보고서>를 읽었다. 모든 진술 하나하나가 변함없이 가슴 아프고 기가 막히고 차라리 믿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이를테면 한 생존학생 부모가 진술한 “긴급 생계비가 통장잔고가 300만원 이상 있으면 안 되고…” 이런 내용은 사실인지 확인해보고 싶을 정도였고, “물속에서 친구가 발목을 잡았는데 뿌리치고 나온 아이, 복도까지 나왔다가 뒤에 한손 잡고 있던 친구들이 물에 떠내려간 아이… 그냥 나온 게 아니죠… 화장실에 있는 걸 봤는데 나오라고 손 내밀어도 무섭다고 안 나오더래요… 화장실만 가면 그 (아이) 생각이 나고…” 이런 내용은 읽다 보면 생존 학생들이 앞으로 겪어내야 할 일 때문에 심장이 아플 정도였고 자, 이제 뭘 할까? 어디서부터 시작해볼까? 잠 못 이루고 서성거리게 된다.

이럴 때 제일 먼저 세월호 유족과 피해자 곁으로 달려갔다가 구속된 4·16연대 박래군 상임위원이 생각난다. 사실 박래군의 구속 뉴스를 듣자마자 눈물이 가득 고였었다. 내게 박래군은 어떤 존재냐면, 추한 현실을 깊은 이해와 연민과 다정함과 책임감으로 가득한 영혼의 바람이 불어오는 참된 현실로 바꿔놓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박한 사랑, 평범한 마음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얼마나 숭고해질 수 있는가를 알게 해주었다.

박래군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떠오르는 책 속의 인물이 한 명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에 나오는 인물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평화와 위안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찮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용감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고향인 크레타의 험준한 산으로 갔다. 독일군이 노르웨이로 쳐들어가 정복하려고 싸우던 무렵의 일이었다. 어느 날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산기슭을 건너는데 위에서 사나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여봐요! 잠깐 기다려요. 하나 물어봅시다.”

어떤 남자가 커다란 바위에서 고꾸라지듯 내려왔는데,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대체 뭘 알고 싶어서 저렇게 극성일까라고 생각했고 그는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다.

“이봐요, 노르웨이는 어떻게 되어갑니까?”

그 남자는 나이 든 양치기였다. 그는 어느 나라가 곧 정복되리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노르웨이가 어떤 나라이고 어디에 있으며 어떤 사람들이 사는 곳인지는 전혀 몰랐다. 그가 분명히 알았던 사실이라고는 자유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뿐이었다.

“상황이 좋아졌어요. 영감님, 좋아졌어요.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다행이구먼.”

“담배 태우시겠어요?”

“제기랄! 내가 뭣하러 담배를 피워요? 난 아무것도 필요없어요. 노르웨이만 별일 없다면 그만이지.”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그 말을 하고 늙은 양치기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양떼를 찾아 기어올라갔다. 그의 말을 거듭거듭 곱씹으면서 박래군을 생각한다. 늙은 양치기는 어떻게 그렇게 먼 나라의 자유에 대해서 그렇게 실감나게 고민할 수 있을까?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유는 바로 이렇게 탄생한다고 생각했고 전투적인 의무감을 느꼈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오늘 밤 박래군이 그립다. 그리고 지금은 나 자신을 위한 평화와 위안과 안식을 구할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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