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화 이면의 근현대사 논쟁
현지 위안부와 달리 한국인 위안부는 전선의 변경으로 일본군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2013년 첫 공개 당시 논란을 일으켰던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는 위안부 관련 사진 설명에 "일본군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적어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축소·왜곡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4년 이후 보수우파의 집중공격
교과서가 ‘정쟁’의 대상으로 변해 “국정교과서 집필 참여자
정부에 호의적인 사람일 수 밖에
다수 역사학자 참여 힘들것 ” ■ ‘용어 갈등’ 막 오르다 2004년, 근현대사를 둘러싼 ‘정쟁’이 불타올랐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반민족 친일행위와 권위주의 정권 때 인권침해 진상 규명을 제의한 뒤였다. 한나라당에서는 친북·용공 활동도 조사 대상에 넣어야 한다고 맞섰다. ‘용어 논란’은 이처럼 과거에 대한 ‘해석 투쟁’의 하나였다. 학계는 교과서 서술 용어에 따른 ‘역사 전쟁’의 첫 총성이 울린 때를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으로 기록한다. 교과서 집필 가이드라인인 ‘국사교육 내용 준거안’에 대해 보수 언론은 ‘항쟁’이란 용어를 트집 잡아 좌파적 민중사관에 입각했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당시 준거안 마련에 참여한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보수 언론이 가장 문제 삼은 것은 대구 ‘10월 사건’과 제주 ‘4·3항쟁’이었다”며 “현대사의 중요 사실을 교과서에 언급하자고 했을 뿐인데 냉전 수구 언론에 의해 재해석되고 문제가 불거질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개념 논쟁’ 사건이 바로 2011년 이명박 정권 때 벌어진 ‘자유민주주의 파동’이었다. 애초 역사 교육과정을 개발한 학자들이 현대사 부분에서 ‘민주주의’라고 표현한 용어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이주호)가 ‘자유민주주의’로 바꾼 것이다. 교육과정 개정 참여 학자들이 집단으로 항의성명을 발표하는 등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뉴라이트 성향 인사들이 중심이 된 한국현대사학회의 수정 건의를 교과부가 받아들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 정권 따라 교과서도 수정되다 역사 교과서 편찬은 ‘국민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들어가기 일쑤였다. 김영삼 정부가 고시한 제7차 교육과정에 따라 김대중 정부가 발행한 고등학교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가 먼저 도마 위에 올랐다. 2004년 노무현 정부 때 한나라당이 금성출판사 교과서가 “철저하게 좌파·친북”이라며 포문을 열었다. 그즈음 출발한 뉴라이트 단체들도 ‘자학 사관’이라며 비판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들어 ‘좌편향’ 논란이 다시금 발생한다. 금성 교과서 저자였던 김한종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당시 분위기에 대해 “그 이전까지 해당 교과서에 별문제가 없다고 밝히던 교육부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고 말했다. 검정을 주도했던 교육과학기술부가 정권이 바뀐 뒤 발벗고 교과서를 수정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정부, 보수 시민단체뿐 아니라 대한상공회의소 등 재계까지 단합한 총공세였다.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포럼’은 여세를 몰아 2008년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출간했다. “기존의 교과서는 우리 삶의 터전인 대한민국이 얼마나 소중하게 태어난 나라인지, 그 나라가 지난 60년간의 건국사에서 무엇을 성취했는지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김복동 할머니 등 9명은 2013년 12월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며 해당 교과서에 대한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 사진은 2014년 1월 첫 심문기일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연 기자회견 장면.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이슈국정교과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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