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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지금 여기서부터는 너와 함께 가고 싶다

등록 2015-10-15 20:24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펴냄(2015)

얼마 전 내 북토크쇼에 나이 어린 세 친구들이 왔다. 앞줄에 쪼르르 앉은 세 친구는 모두 첫사랑에 실패하고 어두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파르르 떨고 있는 작은, 세 마리 새 같아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입김을 불어넣고 싶었다. 그때 만약 <에로스의 종말>이 출간되었더라면 나는 그 친구들에게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했을 것이다.

<에로스의 종말>은 진정한 사랑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사랑은 왜 위기에 처했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사랑 때문에 치명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일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사랑의 본질을 나와 같은, 나와 잘 어울리는, 나와 잘 통하는 어떤 이와의 안온하고 편안한 만남을 통한 자존감의 근원, 정서적 안정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 책은 사랑을 타자의 침입이자 “주체의 정상적인 균형 상태를 깨트리는 재난”, “밑도 끝도 없이 우리를 급습해서 상처를 입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은 사랑을 자아의 강화나 자아의 만족이라고 하지 않고 자아의 포기, 자아의 파괴, 타자 속에서 자아의 소멸이라고 한다.

사랑의 고통은 타인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사랑을 잃으면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벌거벗겨진 채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비참함과 무력감을 느낄 수 있고, 한때는 자신감과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었던 것이 이제는 상실과 상처의 근원이 된 것에 가슴 에이는 쓸쓸함을 느낄 수 있고, 상대방의 연락에 자신의 모든 미래가 달려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고, 하루 아침에 운명이 바뀐 것처럼 느낄 수 있고, 하루하루를 영원처럼 길게 느낄 수 있고, 내일 내가 제대로 살 수 있을까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하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자의 실존을 처절하게 경험하게 될 뿐만 아니라 폭발적인 자기 해체와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만약 이 시간을 엄격하고 혹독하게 자신을 바꿔나가는 시간으로 여길 수만 있다면, 자신의 욕망부터 자신이 사랑하는 방식까지 고독하게 진실을 마주할 수만 있다면,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에 결사반대할 수만 있다면, 버림받은 시간을 자신의 뭔가를 버리는 시간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파국에 대담하고 용기있게 반응할 수만 있다면 앵무새같이 과거의 말, 생각, 행동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고 어두움을 배경으로 새로운 빛 같은 자아가 솟아오르는 변신을 경험할 수도 있다.

정혜윤 <CBS>(시비에스) 피디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진정한 사랑이란 것이 있다면 그 사랑은 조금 다른 종류의 용기, 조금 다른 종류의 노동, 조금 다른 종류의 힘을 필요로 할 것이다. 용기라면 타자를 발견하기 위해서 자아를 파괴할 용기. 노동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바꿔보려는 힘겨운 노동. 힘이라면 그동안 애지중지해오던 정체성을 가차없이 파괴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현실을 바꾸는 힘. 서로를 위해 둘 다 자신의 소중한 자아를 파괴할 때까지, 결국엔 사랑을 ‘재발명’ 할 때까지 우리는 혼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빛과 어두움을 다 알면서도 결코 스스로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랑하면서 날마다 힘을 키워가는 방법을 알았던, 힘의 원천과 고통의 원천이 같다는 것을 알았던 전사 에이드리언 리치는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읊었다. “난 그녀가 내게 물려준 상처투성이 몸을 사랑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부터는 너와 함께 가고 싶다/ 고통을 천직인 양 받아들이라는 유혹에 맞서 싸우면서”(<문턱 너머 저편> 중 ‘스물한개의 사랑시’에서)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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