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니시가 조사한 을분에서 나온 칠기와 토기 등의 유물들. 위쪽에 활 모양으로 휘어진 유물이 이마니시가 왕(王)자 명문이 새겨진 것을 발견한 칠기반의 테두리 조각이다. 이 글자의 발견을 이마니시가 보고하면서 대동강변 석암리 고분들은 낙랑군의 유적이라는 설이 점차 설득력을 얻게 된다.
‘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⑧ 석암동 무덤 출토품 논란 2
이마니시 발굴 계획 야쓰이는 몰라
야쓰이와 별개로 평양 무덤 조사
출토품서 ‘왕’자 발견 ‘낙랑’ 단서돼
고구려 유물로 믿던 야쓰이에 일격
⑧ 석암동 무덤 출토품 논란 2
이마니시 발굴 계획 야쓰이는 몰라
야쓰이와 별개로 평양 무덤 조사
출토품서 ‘왕’자 발견 ‘낙랑’ 단서돼
고구려 유물로 믿던 야쓰이에 일격
1909년 11월1일 평양 석암리 고분에서 쏠쏠한 성과를 올린 뒤 경성에 돌아온 야쓰이가 아흐레 만에 도쿄제국대학 동기이자 학문적 맞수였던 이마니시 류와 마주친 것은 초창기 조선 고적조사의 향방이 엇갈리는 한순간으로 남게 된다. 이마니시와 스승 하기노 유지 도쿄제대 교수가 꾸린 조사단은 그 뒤 야쓰이·세키노 조사단의 행로를 되밟아 평양에서 벽돌식 무덤을 따로 조사하면서 낙랑무덤설을 뒷받침하는 성과를 올렸다. 야쓰이는 그달 14일 일본역사지리학회에 보낸 엽서에서 “두 사람은 모레 당지(한성)를 출발하여 평양을 거쳐 의주와 안동 방면으로 간다고 한다. 하기노 선생은 한국의 풍속 중에서 일본의 옛적 후지하라(藤原)시대의 풍속을 오늘날 (여기서) 볼 수 있다고 한다”며 덤덤하게 기술해놓았다. 이마니시가 자신들처럼 평양 대동강변의 무덤을 파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기노와 이마니시는 평양으로 올라가 야쓰이가 조사한 것과 거의 비슷한 양상의 무덤과 유물을 별도로 조사했다. 한달여 전 세키노·야쓰이 조사단이 팠던 대동강변 어귀의 석암리 무덤떼를 비슷한 목적과 방식으로 뒤져 이른바 ‘을분’ 혹은 ‘을묘’라고 부르는 기원후 2세기께 후한 시기의 벽돌무덤을 발굴했던 것이다.
아쉽게도 이마니시의 조사는 현재 공식적인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나중에 세키노, 야쓰이는 이들로부터 조사의 간략한 자료와 사진 일부를 건네받아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고적도보>에 조사 현장과 발굴 유물 사진 일부를 실었다. 이 사진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미약하나마 짐작할 수 있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석암리 을분 전경 사진에 눈덮인 들판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미뤄 이마니시의 조사는 야쓰이가 경주로 내려가 석침총과 황남동 고분을 발굴한 즈음인 1909년 11월말~12월에 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로선 구체적인 발굴조사 경위를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태양 같은 무늬가 새겨진 한나라 거울인 ‘연호문경’(連弧文鏡)과 화분모양 토기, 중원대륙 특유의 회색빛 토기 백색토기, 칠기반상의 테두리 조각 유물 등을 <조선고적도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마니시가 발굴한 유물들은 야쓰이의 발굴 유물들과 흥미롭게 비교된다. 대부분 명확한 중국 한나라계 유물들이고 유물의 성격도 판박이처럼 닮아 있다. 이마니시는 이 유물들을 일본 도쿄로 반출해 도쿄제대 문학부 열품실로 가져간 뒤 천천히 분석하면서 가져온 칠기유물의 테두리에 새겨진 ‘왕’(王)자 명문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이 글자가 낙랑군에 많았던 성씨인 왕씨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런 내용을 1911년 그가 일본 학계에 발표하면서 석암리 무덤이 낙랑 유적이라는 설은 학자들 사이에서 점차 설득력을 얻게 된다. 야쓰이와 행로가 엇갈린 이마니시 조사단의 발굴 성과가 일제강점기 평양 일대의 고고 발굴 붐을 낳았던 낙랑군 한반도재지설의 물꼬를 터놓은 셈이었다.
1910년까지 야쓰이·세키노 조사단은 철썩같이 고구려설을 믿고 있었다. 이마니시를 만난 뒤인 23일 그들은 경성 광통관에서 ‘한홍엽’이란 제목의 일본 거류민 대상 강연회를 열어 한결같이 고구려 유적설을 고집했다. 세키노와 야쓰이, 조수 구리야마는 “석암리 고분 출토품의 유물 연대가 중국의 삼국서진시대인데, 그 시기의 평양은 고구려 수도였으므로 무덤떼는 고구려 강역일 수밖에 없다. 유물들은 고구려가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요소들로 봐야 한다”고 했다. “고구려 영역에서 잘 쌓은 고분이 나왔다면 당연히 고구려 무덤일 것”(구리야마)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학설은 실증적 근거가 빈약했고, 다른 이견들의 제기에 따라 번복되는 데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첫 계기가 이들이 일본에 돌아간 1910년 상반기 일본 도쿄제대 경내의 상산회관에서 열린 사학회 학술발표회였다. 세키노가 그 전해 조선 고적조사의 성과를 발표하는 이 자리에서 지금도 일본 역사고고학계의 유명한 사건으로 회자되는 극적인 해프닝이 벌어진다.
야쓰이, 이마니시도 함께 동석한 이 자리에서 세키노는 석암리 고분이 고구려 유적이란 기존 결론을 재차 강조하며 발표를 마치려 했다. 그때 청중석에서 누군가가 ‘이의가 있다’며 손을 번쩍 들었다. 당시 도쿄제대 인류학과 조교수였던 도리이 류조라는 소장학자였다. 평생을, 만주·중국 일대의 고고인류학 조사에 매진하며 훗날 일본 인류학계의 전설, 신으로까지 불리게 되는 도리이는 ‘고구려설은 이해할 수 없다’며 매서운 반론을 꺼내들었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909년 연말 이마니시와 하기노가 조사한 대동강변 을분 모습. 주위가 눈에 덮여 있어 겨울에 발굴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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