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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일본학자들이 뭘 조사했는지도 모르면서 식민사학 극복할 수 있나

등록 2016-09-19 15:37수정 2016-09-26 10:51

‘조선발굴비사’ 연재 끝낸 정인성 교수 경주답사 인터뷰
야쓰이비망록 연구는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한 것
일본학자들 독점한 일제강점기 고적조사 진실 온전히 밝혀야
목적도 원칙도 불투명한 경주 속도전 발굴복원은 국가폭력
야쓰이가 1909년 굴착조사한 경주 황남동 남총 앞에서 정인성 교수가 당시 유적 발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고분은 석침총과 더불어 근대기 들어 처음 관의 지원 아래 학술조사된 경주 고분으로 꼽힌다.
야쓰이가 1909년 굴착조사한 경주 황남동 남총 앞에서 정인성 교수가 당시 유적 발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고분은 석침총과 더불어 근대기 들어 처음 관의 지원 아래 학술조사된 경주 고분으로 꼽힌다.
“이 잡풀로 뒤덮인 둔덕이 1909년 경주에서 근대기 처음 민관 학술조사가 벌어진 신라 고분 석침총입니다.”

가시덤불을 헤치며 그가 손짓한 곳에 윗부분이 내려앉은 초라한 몰골의 석침총이 있었다. 누구도 돌보지 않아 100년 전 일본 학자 야쓰이 세이이치가 마구 파헤쳤던 흔적이 그대로 남은 채 숲 속에 방치된 상태였다. “일반인은 물론 연구자들도 정확히 위치를 아는 이들이 별로 없다”고 했다.

유례없는 지진이 경주를 뒤흔들기 전날인 11일 낮 고고학자 정인성 영남대 교수와 함께 돌아본 경주시 외곽의 장산 고분들은 관리의 사각지대에 버려져 있었다. 수백기 고분들이 산을 뒤덮었지만, 개략적인 분포도만 나왔을 뿐 제대로 실측조사된 적이 없는 비운의 유적이다. 이곳에서 서천을 건너 수킬로미터 떨어진 황남동 고분공원 남쪽의 황남리 남총도 비슷했다. 과거 야쓰이가 함께 처음 발굴한 국내 고고학사상 중요한 유적이지만, 절개한 흙더미와 함께 둔덕처럼 내버려져 있다.

이 석침총과 황남리 남총이 100년 전 야쓰이에 의해 발굴된 비화는, 정 교수가 지난해 일본에서 입수한 야쓰이의 고적 조사 관련 문서 1만여점의 컬렉션 ‘야쓰이 비망록’의 주요 내용을 3월부터 이달 초까지 <한겨레>에 소개한 연재물 ‘야쓰이비망록으로 본 조선발굴비사’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야쓰이가 3세기 일본 진구왕후의 한반도 정벌설을 실증하기 위해 처음 파헤쳤던 석침총, 황남리 남총 발굴과 국내 학계 고대사 논란의 씨앗이 된 평양 일대의 석암리 낙랑계 유적, 나주 반남고분 발굴의 비사 등이 연재물을 통해 공개됐다. 정 교수는 이 연재의 의미를 “일인들이 근대기 처음 독점발굴했지만, 지금은 잊힌 석침총, 황남리 남총 같은 고대 유적 조사의 내용과 성과를 온전히 우리 것으로 되돌리고 교훈을 얻는 것”이라고 짚었다.

“야쓰이 비망록의 조사 내용들은 한국 고대사를 재구축하기 위한 근거자료로서의 의미가 큽니다. 야쓰이와 세키노는 구한말과 일제강점 초기인 1910년대 한반도 고고유적의 윤곽을 처음 잡고 실체를 파악한 주역들입니다. 조선 통치기반 조성이라는 총독부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성격이었고 조선인들을 철저히 배제했지만, 그들의 견해 상당수를 지금도 우리 학계에서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형편입니다. 그들이 뭘 했는지 알아야 식민사학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는 겁니다.”

정 교수는 1998년 도쿄대에 세형동검을 연구하러 유학했다가 창고에 일제강점기 때 반출된 조선 유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세키노와 야쓰이의 초창기 고적조사 연구에 몰입하게 됐다고 한다. 2002년 ‘낙랑문화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도 3년여간 귀국하지 않고 세키노 자료를 정리해 ‘일본에 있는 고구려 유물’(전 4권·동북아재단 펴냄) 등의 공동 연구 성과를 냈다. 그는 지난해 어렵게 입수한 야쓰이 비망록과 다른 초창기 고적조사 자료들을 계속 추적, 분석해 여전히 전모가 안개에 싸인 일제강점기 한반도 고적조사의 실체를 드러내는 데 매진할 각오다. “야쓰이 비망록은 분석하고 밝혀야 할 부분들이 무궁무진합니다. 그의 조사 경위와 경로, 참여 인물 등에 대한 추가자료들을 계속 발굴하고, 한일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데 힘을 쏟으려 합니다.”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야쓰이가 1909년 굴착조사한 경주 황남동 남총 앞에서 정인성 교수가 당시 유적 발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고분은 석침총과 더불어 근대기 들어 처음 관의 지원 아래 학술조사된 경주 고분으로 꼽힌다.
야쓰이가 1909년 굴착조사한 경주 황남동 남총 앞에서 정인성 교수가 당시 유적 발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고분은 석침총과 더불어 근대기 들어 처음 관의 지원 아래 학술조사된 경주 고분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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