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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대한국국제와 개와 돼지

등록 2016-07-14 20:29수정 2016-07-14 20:47

강명관의 고금유사
19세기 말 한반도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들이 독립협회를 만들고 만민공동회를 열어 정치운동에 나섰다. 운동이 정치개혁과 참정권 요구로 방향을 잡자, 대한제국의 지배세력은 1899년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9조목을 공포해 대응했다. 곧 대한제국의 헌법이다. 여기에 과연 나라의 위기를 타개할 묘수가 실렸던 것인가. 어디 보자!

1조는 ‘대한국은 자주독립의 제국(帝國)’이란다. 곧 자주독립한 ‘황제의 나라’란다. 이게 중요하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황제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2조는 대한제국의 정치는 500년 전부터 이어져온, 앞으로 만세에 걸쳐 변하지 않을 ‘전제정치’(專制政治)란다. 곧 황제의 독재정치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황제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향유한다(3조).

국민 아닌 ‘신민’(臣民)이 황제의 군권을 침해, 손상시킬 경우, 그 행위가 일어났거나 나지 않았거나 막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상실한 자로 인정한다(4조). 아마도 무한한 처벌이 따를 것이다. 전제정치의 무한한 군권이란 것의 내용은 이러하다. 육군·해군을 통솔하고 계엄·해엄을 명할 수 있다(5조). 법률의 제정, 반포, 집행을 명하고, 대사(大赦)·특사·감형·복권을 한다(6조). 관제(官制)와 봉급을 제정, 개정하고, 행정상 필요한 칙령을 발동할 수 있다(7조). 모든 문무관(요즘의 공무원)의 임명, 해임을 한다(8조). 조약을 맺은 국가에 사신을 보내고, 선전(宣戰)·강화 및 여러 조약을 체결한다(9조).

황제는 권력의 총체다. 한마디로 한반도의 땅과 강과 하늘과 바다는 모두 황제의 것이고, 당연히 거기 사는 2천만명의 사람 목숨도 황제의 것이다. 나라 전체가 황제 고종의 사적 소유물인 것이다. 당연히 ‘신민’에게는 그 어떤 정치적 권리도 없었다! 고종이 도장을 찍은 그날 대한제국이 일본으로 넘어간 것은, 대한제국 전체가 황제의 사적 소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실로 무능했지만 자기 권력 유지에는 기민한 인간이었다. 자신의 무한한 권력을 인정하는 대한국국제를 보고 당연히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고종에게 대한국국제를 만들어 올린 자들 역시 고종과 한통속이었다. 등신 같은 황제만 조종하면 국가권력을 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었기에 이 대한국국제를 만들어 올린 것이다. 2천만명 민중의 생명과 이익은 안중에 없었다. 자신만 안전할 수 있다면, 자기 이익만 챙길 수 있다면, 나라도 민족도 팔 수 있었다.

고종과 지배계급을 몰아내었더라면 그들은 교훈을 얻었을 것이고, 한반도의 운명 역시 달라졌을 것이다. 그 일을 하지 않았던 탓에 그들의 후예는 지금도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고 99%의 ‘신민’ 아닌 국민을 ‘개와 돼지’로 본다. 미루어둔 숙제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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