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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만든다’는 것, 사랑하는 것, 연결되는 것

등록 2016-08-25 19:23수정 2016-08-25 19:39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우주 만화
이탈로 칼비노 지음, 김운찬 옮김/열린책들(2009)

요즘 저녁 여섯시 반부터 매일 방송되는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라는 시사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늘어난 뉴스의 양과 속도에 놀란다. 그 뉴스 속에 마구마구 섞여 들어 있는 인간의 사회적 삶, 내밀한 삶, 사회와 개인의 역사, 인간 자체의 본성-돈, 권력, 힘에 대한 추구, 혐오, 무시, 폭력, 불안, 잔인함, 허무주의, 그리고 그에 결코 뒤지지 않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지적 호기심, 정의감, 양심, 연민, 존중받고 기쁨을 느끼고 싶어하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이란 것을 하고 싶어진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 스스로를 다치게 하는지, 또 다른 인간과 자연을 얼마나 다치게 할 수 있는지를 보면서 그 반대 방향(자신을 포함해서 다른 생명을 살리는 방향)은 어떻게 가능할까 생각이란 것을 하고 싶어진다. 특히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뭔가를 ‘만든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이를테면 프로그램을 만든다. 한편의 글을 만든다. 하나의 관계나 몸짓이나 다정한 저녁식사 자리를 만든다)에 대해서 생각이란 것을 하고 싶어진다.

혼란 속에서 거의 불가해한 자신만의 질서를 찾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 만화>에서 태초에 조개 한 마리가 사랑에 빠졌다. 누구랑? 아직은 만나본 적 없는 그녀랑. 그런데, 만나본 적 없이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가능했다. 만난 적이 없으니 그녀의 몸매나 얼굴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통속적이고 둘은 서로 주고받는 신호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한 존재를 다른 모든 존재와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므로 각각의 존재가 보내는 신호는 너무나 중요했다. 문제는 자신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확실한데 그녀 또한 자신을 사랑하는지 도무지 확신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개는 자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표시해줄 무엇인가를 만들고 싶어졌다. 조개에게는 이 ‘만들고 싶어졌다’ 자체가 일대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전에는 한 번도 무엇인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때부터 태초의 조개는 석회질 물질을 분비해 껍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에 대한 모든 사랑, 그 사랑 안에 존재하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면서 무한히 변하려는 마음 등 나선형으로 휘감긴 껍질 안에서만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 안에 집어넣었다. 만들려는 노력에서 나중에 큰 차이로 발전할 무수히 많은 생각과 무수히 많은 유형의 행동들이 따라 나왔다. 그렇게 해서 우주에 나선형 조개껍질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뭔가를 ‘만든다’는 것은 한 존재로 다른 인간과 연결되는 것, 다른 인간의 마음에 접속하는 것과 관련이 된다고 느껴진다. 친구를 발견하려는 노력, 마음을 주고 믿을 만한 동료 인간을 찾으려는 노력,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으려는 신호와 관련이 된다고 느껴진다. 혼란 속의 질서는 혼란 속의 사랑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듯하다. 내 사랑과 내가 만드는 것이 연결되었다고 느껴지는 날, 그러니까 내 사랑은 결코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사랑이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함께) 만드는 것을 나선형으로 빙빙 휘감고 있는 것이 보이는 날, 그날은 나도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고유한 안정감을 느끼면서 퇴근한다.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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