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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용서?

등록 2016-11-04 20:06수정 2016-11-04 20:12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아주 특별한 용기>, 엘렌 베스 ? 로라 데이비스 지음, 이경미 옮김,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 이원숙 감수, 동녘, 2000

<아주 특별한 용기(The Courage to Heal)>는 근친 성폭력을 다룬다. 어린이 성폭력 생존자의 치유와 가족, 상담자를 위한 안내서(부제)다. 성폭력에 대해 이만큼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책도 드물 것이다. 미국에서 1992년에 출판되었고 한국에서는 두 번(2000, 2012) 출간되었다. 생존자든 가족이든, 둘 다 아니든 읽기 쉽지는 않다. 독자도 근친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침묵과 비밀의 카르텔, 자신의 무지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가 정찬의 표현(<한겨레> 10월28일 칼럼 ‘블랙리스트, 공동정범, 브레히트’)대로, 사랑이 꿈과 기적 사이에 있다면 모욕은 절망과 죽음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이다. 어떤 모욕은 죽음 직전의 단계다. 복수를 마음먹지만 문제는 복수가 아니라 그것이 불가능한 현실이다. 절망과 죽음이 내 몸을 서로 잡아당겨서 열상(裂傷)인 지경을 누가 알겠는가. 내게 일어난 일은 절대로 사라지는 법이 없지만 가해자나 타인에게는 그렇지 않다.

가해자를 용서하려면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대방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대개는 나는 죽어도 잊을 수 없는데 상대는 모르거나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한다. 나는 평화, 화해와 용서 따위의 아름다운 말을 강조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약자는 이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용서처럼, 행위 자체는 드물면서 그토록 많이 쓰이는 말도 흔치 않을 것이다. 나는 용서가 중요하거나 필요한 일이 아니며, 무엇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가해자가 처벌받으면 천운이고, 피해자와 가해자는 각자 자기 길을 가면 된다. 용서는 판타지다. 용서만큼, 가해자 입장의 고급 이데올로기도 없다.

나는 용서에 관한 환상을 깨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누구를 미워하면 괴로우니 본인을 위해서라도 용서하라는데, 안 괴로운 사람도 많다. 고통받으면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하다. 동시에 피해는 정체성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근친 성폭력처럼 가족 내부의 폭력과 방관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것이 피해자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분노와 만난다면, 즉 분노를 엉뚱한 자리에 배치하지 않고 적절하게 조준하면 평생의 힘이 되기도 한다.

용서? 원문에 “?”가 붙어 있다(228~236쪽). 이 책은 “용서가 반드시 필요하지도, 희망할 것도, 공략할 문제도 아니며 마지막 목표는 더더욱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나를 비롯한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자기 행동이 타인에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산다. 특히 성폭력 가해자나 젠더 문제로 여성에게 모욕을 준 사람 중에서 자기 죄를 깨닫는 이는 드물다. 그 무지가 권력인 세상, 여성이 살기 힘든 이유다.

용서의 근본적인 부정의(不正義)는 용서할 대상이 없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약자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대표적 예였다. 가해자를 숨기면서 피해자에게 용서와 화해를 강요하는, 이 악의 정체는 무엇인가. 누구를 용서하란 말인가.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말은 생존자의 감정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심지어 부정하는 행위다”, “가해자로부터 무엇인가를 되돌려 받으려는 시도는 포기하는 것이 좋다”, “용서는 고차원의 선(善)도 아니고 용기 있는 행동도 아니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이 책에서 유일하게 강조하는, 반드시 필요한 용서는 생존자 자신에 대한 용서다. 성폭력 피해와 다른 피해의 대표적 차이는 피해자의 죄의식이다. 자신을 용서하는 일은 내 안의 가해자를 밖으로 내보내는 과정이다. ‘그 일’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닐 수 있다. 가해자를 붙잡고 살 시간이 없다. 이제까지 고통받은 시간으로 충분하다. 이후 삶이 자신에게 맞춰지는 시점, 치유가 시작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 작업을 혼자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폭력은 사회의 일이다.

내 주변에는 이 책이 ‘내 인생의 책’이라는 이들이 많다. 보편적인 치유서이기 때문이다. 고통받은 자신에 대한 사랑, 기적이지만 가능하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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