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근대 과학이 뿌린 민주주의 씨앗

등록 2016-12-08 19:41수정 2016-12-09 17:22

정인경의 과학 읽기
서유견문
유길준 지음, 허경진 옮김/서해문집(2004)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1895년에 출간되었다. 동학농민봉기와 갑오개혁 직후였다. 서양과 주변 열강의 침략에 맞서려면 서양 배우기가 시급했고, 자기 개혁 또한 절박한 시점이었다. 조선의 지식인이며 정부 관료였던 유길준은 서양 문명의 핵심을 이해하고 번역할 의무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주권을 잃지 않고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을까? ‘자주’와 ‘개혁’이라는 역사적 과제 앞에서 나온 문제작이 <서유견문>이었다. 서양을 유람하고 쓴 여행기 정도로 오해해서는 안 되는 책이다.

<서유견문>은 서양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던 유길준은 2년가량 유학생활을 통해 서양 근대 문물을 직접 체험했다. 그는 미국의 저명한 동물학자 에드워드 모스(Edward S. Morse, 1838~1925)의 지도를 받았고 조선에 온 이후에도 오랫동안 서신을 교환했다. 그래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 산업, 정치, 문화, 교육 등을 망라한 백과사전과 같은 책을 쓸 수 있었다.

유길준은 조선인에게 서양을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널리 알리고자 열망했다. 그는 국한문 혼용체로 글을 썼고 조선인의 관점에서 서양 문명을 주체적으로 소화하려고 애썼다. <서유견문>은 한국과학사 수업에서도 학생들에게 권하는 필독서다. 우리가 어떻게 서양의 과학기술을 인식하고 도입했는지를 살펴보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참고서가 없기 때문이다. 직접 읽어본 학생들 대부분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서유견문>의 첫 문장은 “지구는 우리 인간들이 사는 세계인데, 역시 행성의 하나다”로 시작한다. 지구는 태양계에서 하나의 행성이고 자전하고 공전한다는 것이다. 제1편과 제2편에서 지구 환경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상세하게 서술되는데 이것은 지구의 어느 나라도 중심이 될 수 없으며, 중국도 예외가 아니라는 유길준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세계는 무엇인가’ 하는 과학적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가치체계도 달라져야 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서유견문>은 서양의 근대 과학을 토대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정치사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또 하나 예를 든다면, 생물학적 인간의 존재를 인정한 천부인권론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이치는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다.”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나 저마다 사람이 되는 이치를 본다면, 사람 위에도 사람이 없고, 사람 아래에도 사람이 없다.” <서유견문>에서 밝힌 내용은 갑오개혁에 반영되었다. 과부의 재가와 노비제의 철폐, 인신매매 금지 등 조선에서 처음으로 신분적 차별제도가 폐지되었다.

서양의 학문체계에서 근대 과학과 정치사상은 공존하고 있었다. 물론 유길준은 이를 간파했다. 19세기 말 <서유견문>은 오늘날 우리가 광장에서 외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기본원리까지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 안에서 실시하는 주권은 그 나라의 커다란 법과 원리에 의하여 인민들에게 주어졌으며, 통치자에게 맡겨져 있다.” “나라에서 정부를 설치하는 근본 의도는 국민을 위한 것이고, 임금이 정부를 명령하는 커다란 뜻도 국민을 위해서다.”

정인경 과학저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비밀의 은행나무숲’ 50년 만에 첫 일반 공개 1.

‘비밀의 은행나무숲’ 50년 만에 첫 일반 공개

1600년 전 백제인도 토목공사에 ‘H빔’ 사용했다 2.

1600년 전 백제인도 토목공사에 ‘H빔’ 사용했다

“노벨상 작가 글이니”…쉽게 손댈 수 없었던 오자, ‘담담 편집자’ 3.

“노벨상 작가 글이니”…쉽게 손댈 수 없었던 오자, ‘담담 편집자’

한강을 ‘2순위 후보’로 꼽은 이유 [The 5] 4.

한강을 ‘2순위 후보’로 꼽은 이유 [The 5]

한승원 작가 “깜빡 잊고 있다가, 세상이 발칵 뒤집힌 느낌이었죠” 5.

한승원 작가 “깜빡 잊고 있다가, 세상이 발칵 뒤집힌 느낌이었죠”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