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구운몽>, 최인훈 지음, 문학과지성사, 1976
자주 가는 중고서점 사장님이 유독 반갑게 맞이한다. “요즘 기분이 어떠세요?”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뭐, 그저 그렇죠”라고 인사했다. 그는 ‘감격 상태’였다. “우리 국민들 대단해.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민주주의가 이런 거지.” 그런 분 앞에서 “저는 촛불시위에 한 번도 안(못) 나갔는데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200만 촛불=민주주의’일까. 그렇기도 할 것이다. 2016년 현재 서울 시민은 1천만명. 웬만한 사람은 다 나왔다는 얘기다. 경향 각지에서 모였다 해도 200만명 이상의 참가를 단지 민주주의에의 요구라고만 할 수 있을까. 냉소나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어렸을 적에는 몰랐는데 최근 <광장>을 읽으니, 지금 ‘광장’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문헌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인훈보다 주인공 이명준이 더 유명한 작품. 작가의 나이 24세, 1960년 10월에 발표되었다. 당시 작가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빛나는 4월(4·19)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새 공화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최인훈은 미국 생활 등을 통해 <광장>을 여러 차례 고쳐 썼다. 이 글의 출전은 다섯 번째 개작한 1976년 초판이다. 1989년까지 47쇄, 재판(1992년) 19쇄본이다. 뒤표지의 김영태 시인이 그린 소묘도 깔끔하고 김현의 해설이 실려 있다. 2015년까지 총 189쇄를 찍었다고 한다. 작품성을 의심하는 이는 없지만 이토록 많이 읽힌(팔린) 이유는 오독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처음 읽었던 1980년대에 이 작품은 ‘회색인’(그의 동명작이 아니라)의 대명사였다. 분단, 중립국, “조용히 방황하는 다수” 같은 담론이 <광장>에 대한 해석을 독점했다. ‘난쏘공’처럼 “입시에 꼭 나오는 한국 소설”. 참고서에 나오는 <광장>과 실제 작품은 다르다.
문장 한 줄 한 줄이 아름답고 정확하다. 좋은 작품은 시차를 두고 두 번 이상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새삼 했다. <광장>은 분단 문제를 다룬 소설이라기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의 깊이와 두려움, 그리고 인생을 직접 체험하라는 일종의 ‘청춘 소설’이다. 자본주의와 생활양식의 변화로 1960년대와 지금 광장(시위)의 의미는 다르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광장과 일상의 격차다. 아래 구절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15쪽) 공/사, 일상/현실 정치, 구조/개인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뛰어난 인식이다.
촛불은 박-최 게이트에 대한 분노가 결정적 계기였다. 또한 과거와 달리 남성 시민과 경찰 간의 ‘폭력 투쟁’이 아닌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참여가 지속성과 1천만명 기록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촛불과 민주주의를 동일시할 때 민주주의는 협소해질 수도 있다. 광장과 민주주의의 관계는 복잡하다. 상호 작용일수도 반작용(일상 탈출)일 수도 있다.
광장에서는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민주주의를 이뤄냈다는 자부심을 느끼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고립과 경쟁, 위계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 안의 최순실’과 ‘최순실들’은 다르다. 전자는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성찰이지만, 후자는 실제 적대자다. 그 많은 최순실들과 이전투구해야 하는 일상의 피로와 우울. 누구나 위로받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광장은 민주주의의 학교이자 괴로운 일상을 견디게 해주는 재충전의 공간이다.
광장과 일상은 연속이어야 한다. 광장이 곧 민주주의는 아니다. 민주주의는 일상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개화기 만민공동회부터 반복된 실패, 즉 촛불은 사회변화가 아니라 정치권만의 이합집산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우리의 요구는 정권교체를 넘는 일상의 정의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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