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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척도는?

등록 2017-03-02 19:24수정 2017-03-02 20:15

정인경의 과학 읽기
측정의 역사
로버트 P. 크리스 지음, 노승영 옮김/에이도스(2012)

프랑스 혁명 당시, 과학자들은 도량형 개혁에 나섰다. 우리가 오늘날 쓰고 있는 ‘미터’가 이때 등장했다. 미터는 ‘척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메트론(metron)’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카데미의 과학자들은 북극과 적도 사이 거리의 1000만분의 1을 길이의 기본 단위로 정했다. 이렇게 지구의 크기를 기준으로 하는 미터법이 탄생했다.

1789년에 제정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제1조는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 있어 평등하게 태어나 존재한다”로 시작한다.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인권 선언이다. 이러한 혁명 정신과 미터법의 개혁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척도를 소유한 자는 지배자들이었다. 척도가 누구에게나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프랑스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이들은 법 앞에 평등을 원하듯 모두를 위한 척도(미터)를 원했다. 불변하는 자연, 지구의 크기를 잰 척도는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ruler)가 될 것이고, 시민의 지배자(ruler)가 될 것이다. 이같은 믿음에서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미터법 혁명이 추진되었다.

로버트 P. 크리스의 <측정의 역사>는 척도가 인체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측정에서 기본이 되는 양을 ‘단위’라고 하는데 발과 손가락이 처음으로 쓰였다. 발 길이가 ‘척’, 엄지 손가락 굵기가 ‘촌’이었다. 그 후에 측정 단위는 자연 표준과 연계되는 것으로 점차 확장되었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 자오선의 길이 등이다. 단단한 지구를 기준으로 삼은 미터법은 18세기에 영원한 척도처럼 보였다.

그런데 과학이 발전하면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실이 밝혀졌다. 태양이 다 타버리고 지구가 소멸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것. 그런 먼 훗날에는 지구의 길이와 질량과 시간 표준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다. “밤과 낮의 기준이 되는 지구의 자전이 영구적으로 사라지고 미터와 파운드와 킬로그램이 지구와 함께 태양의 잿더미로 바뀌어 태양계의 부스러기가 될 것이다. 그때 이 표준들은 죽은 과거에서 건져내어 되살릴 수 있을까?”

이제 지구와 태양계를 뛰어넘어 우주에서 변치 않는 척도를 찾아야 했다. 그것은 바로 원자였다. 우주 자체를 구성하는 원자는 어디에서나 똑같고 원자에서 방출되는 빛도 똑같았다. 1983년에 미터는 빛이 진공에서 2억9979만2458분의 1초 동안 진행한 경로의 길이로 정의했다. 이렇듯 인간은 시대마다 자기들이 아는 가장 확실한 것을 측정의 단위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는 척도가 절대적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측정의 역사>를 살펴보면 척도와 단위는 인간이 필요해서 만든 것일 뿐이다. 21세기 고도의 추상적인 물리 상수도 결국 인간이 선택한 사고의 산물이다. 측정은 가치중립적인 행위가 아니다. 측정의 이면에는 측정을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흔들며 다각적인 측면에서 질문을 쏟아낸다. 측정이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가? 우리가 측정하는 방식이 옳은 것인가? 측정이 우리에게 세상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가? 예컨대 인간의 지능과 같은 측정 방식이 인간의 가치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굳게 믿어왔던 척도들을 하나하나 의심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인경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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