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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머릿속의 왕정

등록 2017-03-09 18:48수정 2017-03-09 18:57

강명관의 고금유사
조선후기의 지식인 윤기(尹愭)는 ‘협리한화’(峽裏閑話)라는 에세이집에서 중국 한(漢)나라의 가의(賈誼)의 <신서>(新書)에 실린 글 한 토막을 인용한다. 내용인즉 상(商)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이 죽자 시신을 대궐 밖에 버렸는데, 그것을 본 백성들이 찾아와 발로 걷어찼다는 것이다. 주왕을 축출한 주(周)나라 무왕이 사람을 시켜 막게 했지만, 그래도 백성들의 발길질은 끊이지 않았다. 주왕은 폭군으로 역사에 혁혁한(?) 명성을 남기고 있는 자다. 민중들의 분노와 증오는 당연한 일이다.

윤기는 이어서 <서경> ‘태서’(泰誓)의 “나를 보살펴 주면 왕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撫我則后, 虐我則?)라는 구절과 <맹자> ‘이루장’(離婁章)의 “왕이 신하를 흙이나 지푸라기처럼 보면, 신하는 왕을 원수처럼 본다.”(君視臣如土芥, 則臣視君如寇?)라는 구절을 인용한다. 전근대의 왕정에서 왕과 백성·신하의 관계는 호혜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원칙일 뿐이었다. 비대칭적 권력관계는 애당초 호혜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왕의 권력이 일방적으로 또 극단적으로 집행되면 백성과 신하는 왕을 원수로 여겼고 급기야 반란을 일으켜 축출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게 있었다. 윤기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무릇 민심이 떠나고 천명(天命)이 끊어지면 ‘천자’라고 해도 일개 범부일 뿐이다.” 피지배자의 지지와 동의를 상실한 왕은 범부에 불과하다. 범부에게 지배받을 이유는 없다. 축출하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주왕을 축출한 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백성의 지지를 받아 주왕을 내쫓고 천하를 차지한 무왕은 유가(儒家)가 성인으로 꼽는 인물이다. 하지만 주나라는 무왕으로 끝이었다. 무왕을 이어 등장한 왕들은 범상하고 무능하고 혼암(昏闇)하고 잔혹한 지배자들이었다. 한 사람 폭군을 축출한다 해서 본질적으로 바뀐 것은 없었던 것이다. 또 주나라가 특수한 경우도 아니었다. 모든 왕조가 같았다. 역사의 외피를 걷고 내면을 보면, 왕이 백성의 삶을 이해하고 개선한 경우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아비를 이어 왕이 된 자는 우연히 왕이 된 그저 그런 인간일 뿐이다. 특별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는 왕으로 자라났기에 예사 백성들을 ‘아랫것’ 혹은 ‘천한 것’들로 볼 뿐이다. 백성들의 삶을 개선할 리 만무다.

이런 문제를 갖고 있음에도 전근대에 왕정이 보편적이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피지배계급이 왕정에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확대된 가족이었고 왕은 그 정점에 있는 아비였다. 어떤 경우에도 아비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윤리를 가장한 거짓관념이 백성들의 대뇌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머릿속에 박혀 있는 이 관념이 왕정의 절대근거였다. 왕정이 자신의 노동과 생산을 일상적으로 털어가더라도 감히 저항을 꿈꾸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니, 왕이 죽으면 흰옷을 입고 눈물을 쏟았다. 왕이 민초들에게 무엇이기에! 이른바 ‘태극기 집회’를 보면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 아직도 왕정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박근혜의 탄핵을 넘어 사람들의 ‘머릿속의 왕정’을 지우는 일도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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