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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신라의 쇠뇌 기술자

등록 2017-04-06 19:02수정 2017-04-06 19:20

강명관의 고금유사
<삼국사기>의 한 토막.

신라 문무왕 9년(669) 5월 당(唐)의 사신이 신라에 와서 황제 고종의 조서를 전한 뒤 쇠뇌를 만드는 제작자를 뽑아 달라고 한다. 당으로 데려가서 쇠뇌 제작 기술을 배우려는 심산이었다. 기술자 사찬 구진천(仇珍川)이 뽑혀 당으로 갔고 쇠뇌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구진천이 만든 쇠뇌는 사거리가 30보밖에 되지 않았다. 고종이 구진천에게 물었다.

“내가 들으니 너희 나라에서 제작하는 쇠뇌는 1천 보를 날아간다는데, 지금 만든 것은 겨우 30보를 날아가니 어찌 된 것이냐?”

“재료로 삼은 나무가 좋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나무를 가져오면 그런 것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다르다는 말에 고종은 다시 사신을 신라로 보내 나무를 가져오게 하였다. 신라에서는 대나마 복한(福漢)에게 나무를 주어 당으로 보냈다. 구진천은 그 나무로 다시 쇠뇌를 만들었지만, 사거리는 그래도 60보에 지나지 않았다. 불쾌해진 고종이 다시 그 이유를 물었다. 대답인즉 이랬다.

“신 역시 그 이유를 모르겠나이다. 아마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나무가 습기를 먹어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고종은 구진천이 고의로 쇠뇌를 제대로 만들지 않은 것이라 여기고, 중죄로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죽이겠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진천은 끝내 자신의 기술을 드러내지 않았다.

쇠뇌는 발사장치를 장착한 기계식 활이다. 사람이 팔로 시위를 당기는 것보다 사거리가 훨씬 길고 관통력이 강한 무기다. 신라는 보통 쇠뇌보다 훨씬 강력한 쇠뇌를 보유했던 것이고, 그것은 아마도 삼국의 통일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당은 자신이 끼어들었던 그 전쟁에서 신라 쇠뇌의 위력을 알았을 것이다. 이 무기가 탐난 당이 신라의 기술자를 불러 제작기술을 알아내려 했던 것인데, 그 기술자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알려주지 않았고, 죽이겠다는 위협에도 끝내 기술의 공개를 거부했던 것이다.

신라는 당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백제와 고구려를 제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곧 당의 도움 없는 통일은 있을 수 없었다. 위의 이야기는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각각 660년, 668년) 직후 일어난 일이다. 당의 도움을 받은 직후였으니 신라의 입장에서는 당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라 쪽은 무기 제작기술을 알려달라는 당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은 군대를 거두어가지 않고 주저앉아 신라 땅을 삼키려 하였다. 신라는 다시 당과 10년에 걸쳐 전쟁을 벌였고 결국 무력으로 당을 몰아내었다. 어떻게 보면 신라는 당을 끌어들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뒤 당을 다시 내쫓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후 당과 원수가 되어 지냈던 것은 아니었다. 신라는 외교를 통해 이후 줄곧 당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로부터 신라의 전성기가 열렸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왜 이런 까맣게 잊어버린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사드 생각이 나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인 한국 정부에 주체성이라든가 외교정책이든가 하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원, 까마득한 옛날 신라만도 못해서야, 이게 나라냐!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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