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정직한 사람

등록 2017-06-08 18:59수정 2017-06-08 19:56

강명관의 고금유사
백사(白沙) 이항복(1556~1618)은 1575년 진사시 초시에 합격한다. 그는 이듬해 1576년 한강 가에 있는 처가의 별장에서 회시(會試, 2차 시험) 공부에 몰두하였다. 백사는 권율(權慄)의 사위였다. 아마도 권율 집안은 한강 언저리 풍광 좋은 곳에 별장이 있었나 보다.

당대의 기인 토정(土亭) 이지함(1517~1578)은 이때 마포에 머무르며 겨울을 나고 있었다. 백사는 까마득한 선배인 토정을 자주 찾아가 공부에 관해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세상사를 듣기도 하였다.

하루는 토정이 자신이 만났던 이인(異人)에 대해 들려준다. 토정에 의하면 그 사람의 소업은 바다에서 배를 부리고 물고기를 잡는 것이었다. 토정은 10년 전 그를 충청도 바다에서 만났고,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전라도 바다에서 또 만났다고 하였다. 그 사람은 아내와 딸을 데리고 배를 집으로 삼아 떠돌며 살았기 때문에 우연히 바다에서 두 번 마주친 것일 뿐이었다. 토정은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싫어해 그의 이름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 사람은 고기를 잡는 여가에 곡식을 배로 실어다 주고 삯을 받아 생활에 보태었다. 그의 배는 벼 300석을 실을 수 있었지만 200석만 차면 더는 싣지 않았다. 화물이 가벼워야 배를 쉽게 부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뱃사람과는 달리 필요 이상으로 무리를 해 가면서 돈을 벌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토정을 불러 함께 고기잡이를 나갔다. 작은 배로 바람이 부는 대로 갔더니 흡사 하늘 바깥으로 나간 것 같았다. 다른 고기잡이배가 이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가 키를 잡고 배를 부리는 솜씨도 보통의 어부가 따를 수 없는 경지였다. 물고기를 굽는 데도 나름 깨친 바가 있는지 구워서 내놓은 고기의 맛은 여느 사람의 것과는 아주 달랐다.

어부가 외출한 어느 날 아내마저 이웃집에 마실을 갔고 딸만 혼자 남아 있었다. 누군가 생선을 사러 왔다. 흥정 끝에 딸은 평소 파는 값의 갑절을 받았다. 아내가 돌아오자 딸은 갑절을 받아낸 것을 자랑하였다. 아내는 질색했다. “이 생선은 평소 파는 값이 있는데, 갑절이나 받았으니 아버지께서 아시면 반드시 크게 노하실 게다.” 정직한 남편의 성정을 아는 아내는 부리나케 생선을 사서 간 사람을 쫓아갔다. 받은 돈의 절반을 돌려주었던 것은 물론이다.

토정이 이인이라며 백사에게 전한 어부는 굳이 따지고 들면 이인일 수 없다. 주문을 외어 비바람을 부르거나 사람의 얼굴을 보고 앞날을 예측하는, 그런 신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다. 배를 집 삼아 물 위를 떠돌며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 약간 특이할 뿐, 그는 그저 욕심을 조금 적게 가지고 정직한 태도로 살아간 평범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자기 일에 열심인 범상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어부와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근래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권력을 한 손에 쥐고 나라를 흔들었던 사람들의 행각을 보건대, 그들에게 욕심과 거짓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싶다. 권력을 쥔 사람이 욕심을 적게 갖고 정직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바람일까?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감탄만 나오는 1000년 단풍길…2만그루 ‘꽃단풍’ 피우는 이곳 1.

감탄만 나오는 1000년 단풍길…2만그루 ‘꽃단풍’ 피우는 이곳

교보문고에 ‘한강 책’ 반품하는 동네서점 “주문 안 받을 땐 언제고…” 2.

교보문고에 ‘한강 책’ 반품하는 동네서점 “주문 안 받을 땐 언제고…”

김수미 추모하며…‘일용 엄니’ 다시 방송에서 만납니다 3.

김수미 추모하며…‘일용 엄니’ 다시 방송에서 만납니다

자동차극장 알바 출신, 문 닫던 영화관 17곳 살려낸 비법 4.

자동차극장 알바 출신, 문 닫던 영화관 17곳 살려낸 비법

김수미가 그렸던 마지막…“헌화 뒤 웃을 수 있는 영정사진” 5.

김수미가 그렸던 마지막…“헌화 뒤 웃을 수 있는 영정사진”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