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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회사 생활이 왜 재난이 돼야 하지?

등록 2018-12-07 06:01수정 2018-12-07 20:12

[책과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죽을 만큼 힘들면 회사 그만두지 그래”가 안 되는 이유
시오마치 코나 지음, 우민정 옮김/한겨레출판(2017)

12월이 왔다. 12월이 왔으니 크리스마스도 올 것이고 라디오에서는 쉴 새 없이 캐럴도 흘러나올 것이고 백화점에서는 크리스마스 패키지 특별 홀리 선물 세트도 팔 것이다.

이러닝 업체에서 일하던 장향미씨와 그녀의 동생 민순씨, 그리고 부모님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민순씨는 웹디자이너로 꿈이 많았다. 동생은 12월2일 토요일 아침 눈물을 펑펑 쏟았다. 회사 일이 너무 많고 직장 내 괴롭힘도 있어서 힘들다는 것이었다. 동생의 야근이 심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동안에도 몇번이나 회사를 그만두라고 말했었다. 그렇지만 동생은 조금만 더 해보겠다고 했다. 직장을 쉽게 옮기면 평판을 잃기도 쉽고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기도 싫었고 경력을 쌓아둘 필요도 있었고 무엇보다 성인으로서 자기 삶을 책임지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그 토요일 아침에 동생은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세부사항을 자세히 듣고 몹시 화가 난 언니는 강남 노동청에 회사 근로감독을 요청했다. 강남 노동청은 올해의 일은 끝났다고 연락을 했다. 언니는 다시 시민단체에 연락을 했다. 시민단체는 출퇴근 기록 등 자료를 모아보라고 권유했다. 크리스마스 식사 때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레 동생의 직장생활과 관련된 것이었다.

동생은 이런 말을 했다. 새로 들어온 후배들도 자기처럼 일할 생각을 하니 후배들이 안쓰럽다,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야근 없는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다. 가족들은 한번 해보라고 그녀를 격려했다. 주제는 무거웠지만 서로의 뜻을 이해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답게 분위기는 따뜻했다.

며칠 뒤 동생은 언니에게 교통카드에 찍힌 자신의 출퇴근 기록 자료를 줬다. “언니 고마워!”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회사는 장민순씨 개인의 우울증 때문이라고 했다. 동생이 유서를 남기지 않았으므로 언니는 출퇴근 기록 자료를 유서로 생각했다.

시오마치 코나의 <“죽을 만큼 힘들면 회사 그만두지 그래”가 안 되는 이유>를 읽으면 이런 유의 구절들이 나온다. 열심히 일해서 행복해져야지. 행복하려면 돈이 필요해.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든 거지? 평범하게 일하려고 했는데 대체 왜 재난 수준의 각오가 필요한 걸까? 왜 죽을 만큼 힘들어도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지? 이런 사람들이 쉽게 듣는 충고는 이런 것들이다. 너만 힘든 게 아니라 너보다 더 일하는 사람들도 있고 남들도 다 하는데 해내야 해. 이 정도도 못 견디면 어디 가서도 못 해내. 책 속 이런 마음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진실은, 우리의 노동시장은 우울증에 걸리거나 죽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할 만큼 우리의 삶을 망쳐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장민순씨가 죽고 난 몇 달 뒤 나는 한 장의 사진을 봤다. ‘야근을 근절하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쓰인 커다란 보드판을 꼭 잡고 동생이 다니던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사진이었다. 언니는 동생의 유언을 이어가기를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그 선택은 장향미씨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고 사랑이 될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도, 세상에도 이런 사랑은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잘 보려 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사랑에 의지해서만 그나마 좋은 변화는 가능했었다.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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