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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서로를 위해 더 강해지는 얼굴들

등록 2019-01-04 06:00수정 2019-01-04 19:54

[책과 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새하얀 마음
하비에르 마리아스 지음, 김상유 옮김/문학과지성사(2015)

한 해의 마지막 날, 강한 사람들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하면서 새해를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에 파인텍 고공농성자들이 있는 굴뚝에 갔다. 2018년이 끝나고 2019년 1월1일이 되는 순간, ‘2019 돈보다 사람! 희망굴뚝 타종식’이 열렸다. 타종식이라고 했지만 종은 보신각 종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작았다. 테이블 위에 앙증맞게 놓여 있었다.

고공농성자를 포함한 서른세명이 소원을 말하고 막대기로 종을 쳤다. 종은 작았지만 소원은 하늘만큼 컸다. 종을 치는 서른세명은 파인텍 두 노동자가 무사히 내려와 공장으로 돌아가는 소원이 이루어지길 빌었고, 해마다 연말이면 해고의 불안에 떠는 간접고용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기를 바랐고, 빈집을 전전하다 목숨을 잃은 아현동 철거민 고 박준경씨와 고시원 화재로 죽은 사람들의 넋과 천호동 성매매집결지 화재로 희생된 두명의 넋이 평온하길 바랐다. 세월호, 스텔라데이지호의 진상이 밝혀져 피해자들과 가족들이 위안을 받기를 바랐다. 밥 한 공기 300원도 받지 못하는 농부들과 가난한 예술가들의 삶이 바뀌길 바랐다. 장애인 비장애인으로 분리되고 나뉘어져 있는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기를 바랐고, 우리 모두의 땀방울이 태양처럼 빛나는 한해가 되기를, 어둠을 밝히려고 거리에서, 공장에서 발로 뛰는 모든 사람들의 염원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행여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애를 태울 가치가 있는 좋은 소원들만 있던 한해의 끝과 시작이었다. 아무도 이런 소원을 품지 않고,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끔찍할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과 닮을 필요가 있다. 이런 소원이야말로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순간에조차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반복해서 말해야 할 것들이다.

굴뚝의 두 노동자 박준호, 홍기탁이 새해에 한 첫번째 말은 “우리의 기원은 부서지기 쉬운 말들의 잔치가 아니라 실천을 결의하는 것이기에 실현되리라 믿습니다. 수많은 민중들의 염원이 실현될 수 있도록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함께 연대하겠습니다”였다. 나는 박준호, 홍기탁이 내려다보고 있을 사람들, 들고 있는 촛불 때문에 저 위에서는 너울대는 한 점 노란 빛으로 보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특히 두 노동자와 함께 연대 단식하는 차광호, 송경동의 반쪼가리가 된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서로 함께 있으면서 더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더 강해지는 얼굴들이었다.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새하얀 마음>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 구절을 새해가 시작되는 이 순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다.

“우리가 기대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가슴이다. 우리 ‘배후에’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영어에도 ‘in back’이 있다. 혹여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의 가슴으로 우리 등을 받쳐주는 사람 말이다. 이따금 그 사람이 우리 어깨에 손을 올리기라도 하면 우리의 마음이 가라앉고, 또한 우리를 잡아주기도 한다. (…) 한밤중에 어떤 악몽에 놀라 잠에서 깨거나 잠들 수가 없을 때, 열병에 시달리거나 어둠속에 홀로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 때, 그때는 몸을 돌려서 자신을 지켜주던 사람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 그 사람은 잠결에 상대방의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잡아주거나 부둥켜안으려 한 손을 어깨에 올릴 것이다.”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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