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정인경의 과학 읽기

후지타 고이치로 지음, 혜원 옮김/반니(2020) 엔(n)번방 사건이 터지고, 차라리 인류가 멸망하는 편이 낫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만큼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데 이럴 때 생물계로 눈을 돌려 성의 진화와 역할을 살펴보자. 일본에서 기생충학자이며 감염면역학자로 유명한 후지타 고이치로는 <유감스러운 생물, 수컷>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생물학적 존재로서 남성의 허약함을 밝히고, 우리가 갖고 있는 성에 대한 상식과 통념을 깨뜨리고 있다. 더 나아가 현대 사회가 직면한 성 갈등에 대해 통찰력있는 혜안을 제시한다. ‘아담이 이브를 만들었다’는 말은 생물학적으로 엄연히 잘못된 것이다. 생물은 모두 여성으로 태어난다. 모든 태아는 염색체의 형태와 상관없이 수정 후 약 7주째까지 여성이었다가 그 다음에 성분화가 일어난다. 또한 45억년 지구의 역사에서 생명체 출현 이후에 10억년 동안 생물의 성은 단일했고 모두가 암컷이었다. 암컷은 전혀 수컷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식을 만들 수 있다. 그러다 지구 환경에 변화가 일어나자, 암컷은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바꿔서 수컷을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단성생식과 유성생식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진딧물의 생태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진딧물은 환경이 나빠지면 수컷을 낳는다.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에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다. 자신의 역할을 다한 수컷은 겨울이 오기 전에 죽는다. 이렇게 생명의 역사에서 수컷은 단지 암컷의 유전자를 나르는 ‘운반자’로 급조되었다. 따라서 수컷의 신체 시스템은 암컷보다 안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수명이 짧고, 암이나 각종 질병에 잘 걸리고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생물의 세계에서는 환경에 따라 수컷이라는 성을 잃어버리는 생물이 많이 있다. 물벼룩, 벼물바구미, 깍지벌레상과(Coccoidea) 등이다. 그럼에도 인간 사회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성의 체구는 여성보다 평균 16퍼센트 정도가 큰데 이러한 신체의 차이가 역사적으로 성적 지배와 사회적 위계질서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 남성의 폭력성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남성의 여성 지배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에 대해 후지타 고이치로는 오늘날 가부장제의 가족제도, 일부일처제 결혼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진화의 과정에서 일부일처제는 극히 일부의 종에서 수컷의 육아참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최근에 저출산과 이혼의 증가로 막다른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는 “전면적으로 ‘일부일처제가 좋다’는 생각을 바꾸어, 더 자유롭고 더 새로운 결혼 형태를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현대 사회는 남성이 필요 없는 환경으로 변모하고 있다. 남성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고, 의학 기술의 힘으로 유성생식을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생물학적으로 불완전하고, 환경적으로 불필요해진 “유감스러운 생물, 수컷”이 처한 현실을 일깨운다. “인류는 수컷을 미련 없이 버리는 걸까” 자문하면서 “인류 멸종을 피하는 의외의 방법”을 귀띔해준다. 어떤 생물종에도 없는, 인간만이 가진 상상력으로 생물의 세계에서 배우는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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