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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그레이 아나토미’가 남긴 사람 이야기

등록 2020-05-01 06:01수정 2020-05-01 12:12

[책&생각] 정인경의 과학 읽기

해부학자

빌 헤이스 지음, 양병찬 옮김/알마(2020)

아침에 일어나 전 세계의 코로나19 현황을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우리는 전염병 확산을 나타내는 숫자와 그래프를 보면서 불안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 숫자는 단순한 지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있음을 알려준다. 이렇듯 전염병의 시대에 수학과 의학, 과학은 다양한 맥락에서 재해석되어 관계와 연대, 성찰의 학문으로 다가온다. 빌 헤이스의 <해부학자>는 인체의 비밀을 파헤치며 죽음과 질병,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사색한다.

이 책의 주인공은 1858년에 초판본이 발행된 <그레이 아나토미>이다. 지난 2세기동안 해부학을 대표하는 고전인데 이 책의 저자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빌 헤이스는 저자 헨리 그레이(Henry Gray, 1827~1861)와 삽화를 그린 또 한 명의 헨리, 헨리 밴다이크 카터(Henry Vandyke Carter, 1831~1897)의 삶과 행적을 추적한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탄생과정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가며, 1850년대에 과학계가 직면한 현실을 입체적으로 조명하였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그동안 질병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1850년대는 대부분 과학자나 의사들이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질병을 일으킨다는 ‘미생물 병인론’을 받아들이지 않던 때였다. 공중위생이나 근대 역학(疫學)이 처음 등장했고, 외과수술에 마취제가 처음 도입되기 시작했다. 병원의 수술방식과 의과대학의 교육과정이 달라지자, 새로운 해부학 교과서가 필요해졌다. 시신 해부를 터부시하던 관행에서 벗어나서 우리 몸의 깊은 곳까지 탐구하게 된 것이다. <그레이 아나토미>는 엄밀한 과학적 지식의 요구에 의해 편찬된 백과사전식 해부학책이었다. 아름답고 정교한 400여점의 인체해부도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윌리엄 하비 등 근대 해부학자의 정신이 스며있었다.

그런데 해부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책의 저자, 그레이에 대한 자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왜일까? 그레이는 34살의 젊은 나이에 천연두에 감염되어 일주일 만에 죽었다. 사망 당시에 그는 개정판 원고를 탈고한 상태였는데 그 원고뿐만 아니라 초판 원고와 삽화도 사라지고 없었다. 추측컨대 전염병을 단속하던 공무원들이 그레이의 손길이 닿은 모든 물건을 불살라버렸던 모양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그의 편지와 일기, 연구노트, <그레이 아나토미>의 초판본 친필원고가 역사에서 완전히 소멸하였다.

빌 헤이스의 <해부학자>에는 그레이의 안타까운 죽음 외에 두 명의 죽음이 더 나온다. 삽화가였던 카터는 병약한 어머니 때문에 의사가 되길 결심했다. 유방암을 앓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회한에 시달렸는데 사실 그의 어머니가 카터를 부르지 않은 것이었다. 의사인 아들이 자신의 죽음으로 무력감에 빠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보고픈 아들을 애써 외면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빌 헤이스의 연인인 스티브의 죽음이 나온다. <해부학자>를 쓰기 위해 빌 헤이스는 해부학 수업에 참여해서 1년이 넘도록 시신에 둘러싸여 지냈다. 죽음의 두려움과 맞서 싸우며 인체 해부를 했지만 정작 죽음과 삶에 대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매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갔고, 그제서야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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