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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잃어버린 여성 과학자의 얼굴을 찾아서

등록 2020-05-29 06:00수정 2020-05-29 08:21

[책&생각] 정인경의 과학 읽기

나의 과학자들
이지유 지음/키다리(2020)

뉴턴은 초상화에 집착했다. 1703년 영국의 왕립학회장으로 선출되자, 화가를 불러 초상화를 그리도록 지시했다. 앤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정치적 권력을 누리던 그는 다른 과학자의 초상화를 떼고 그 자리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놓았다. 초상화는 권력과 명예의 상징이었다. 우리가 어떤 과학자보다 뉴턴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자주 볼 수 있는 그의 초상화 덕분일 것이다. 천재성의 아우라가 빛나는, 뉴턴이 생전에 원하던 모습은 우리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그에 비해 여성 과학자들은 변변한 초상화조차 갖지 못했다. “이름과 업적밖에 없는 여성 과학자들의 얼굴을 찾아주고 싶었어요.” 과학 논픽션 작가 이지유는 동서양의 여성 과학자들을 판화로 찍어 원화전을 열고 <나의 과학자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판화 기법 중에 하나인 실크스크린으로 여성 과학자들의 얼굴과 삶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했는데 판화 작업과정과 작가 개인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독특한 과학책이 완성되었다. ‘나의 과학자들’이듯이 책의 중심에는 50대의 여성 작가 이지유가 서 있다. 그녀는 강한 연대감으로 차별과 편견 속에 살아온 여성 과학자의 인생을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남성 과학자들의 초상화나 사진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매력의 인물화가 만들어졌다.

바버라 매클린톡(1902~1992)은 옥수수에서 ‘점핑 유전자’를 발견해서 81살의 나이에 노벨상을 받은 세포유전학자다. 1940년대 말에 그녀는 놀라운 발견을 했지만 과학계는 유전자가 위치를 바꾸는 전이(transposition) 현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거의 30년 동안 그녀는 무심하고 냉소적인 분위기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연구를 지키다가 말년에 노벨상을 받고 세계적 과학자로 인정받았다. 이지유는 매클린톡의 주름진 얼굴에서 모진 세월을 이겨낸 달관의 표정을 읽었다.

“나는 매클린톡의 편안한 표정에서 그가 미래를 응시하고 있다고 느꼈다. 내 느낌이 옳다면, 아니 옳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에게 편안한 표정을 선사한 감정은 지난한 과정을 다 겪은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고마움일 것이다. 난 그 지난함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비웃었던 그의 논문을 판으로 떠 노란색으로 찍고, 그 위에 매클린톡의 강한 시선을 부각하기 위해 검은색으로 인물을 얹었다. 그리고 평생 그녀와 함께한 옥수수라는 단어를 붉은 계열의 색으로 머리 위에 덮었다.” 이렇게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 매클린톡의 얼굴이 탄생했다.

이 책에는 29명의 여성 과학자가 등장한다. 우리가 모르는 낯선 이름들이 대다수이고, 마리 퀴리나 제인 구달과 같이 알려진 과학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인류가 남긴 과학적 성취 뒤에는 이같이 숨어 있는 여성 과학자들의 헌신이 있었다. 우리가 그녀들을 잊지 않고 찾아내서 옳게 평가하는 것은 현재의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한 작업이다. 과학계의 발전을 가로막는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지유는 이 책을 통해 여성 과학자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지를 고민하며 자신만의 예술적인 방식을 제안하였다. 성공한 여성 과학자의 모델이 아니라 한 인물의 내면을 탐구해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순간을 찾아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시선이 머무를 수 있도록 넉넉한 여백과 이야기를 남겨놓았다.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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