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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 세계가 망해 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등록 2020-07-05 09:00수정 2020-07-05 09:08

[토요판] 특집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의 마지막 말

이명 잊으려 “자잘한 이야기” 요청
작고 전 이틀간 벗들과 나눈 말·글
생전 이 세계에 남긴 마지막 언어

고통의 시간 견디며 생의 끝까지
몰두한 일은 유례없는 지구적 재난
파악하고 성찰하고 모색한 글쓰기
이명의 고통 속에서도 김종철 &lt;녹색평론&gt; 발행인의 생각이 마지막까지 더듬고자 했던 것은 전 지구적 감염 시대로 진입한 이 세계의 미래였다. 2016년 1월의 모습. 김진수 &lt;한겨레21&gt; 기자 jsk@hani.co.kr
이명의 고통 속에서도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의 생각이 마지막까지 더듬고자 했던 것은 전 지구적 감염 시대로 진입한 이 세계의 미래였다. 2016년 1월의 모습. 김진수 <한겨레21> 기자 jsk@hani.co.kr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을 추모(6월25일 새벽 별세)하는 글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개인적 인연이 있든 없든 그 글들에선 ‘저마다의 김종철’이 생전 모습처럼 카랑카랑합니다. 그만큼 그가 한국 사회에 찍은 발자국은 깊고 짙었습니다. 코로나 사태 뒤 건강이 나빠진 그는 외부 기고(4월17일치 <한겨레> 칼럼을 끝으로)와 강연을 모두 중단했습니다. 바이러스는 그의 목소리가 타전되는 길목을 막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이틀 동안 ‘김밥모임’의 “벗들”과 나눈 말과 글을 모임의 일원인 이문영 기자가 모았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언어들입니다.

“몹시 더운 날들입니다. 6월 기온으로는 사상 최고라죠. 시베리아가 뜨거운 시베리아로 되고 있다니, 무섭습니다. 나는 때때로 인간이 어떤 식으로든 다 사라진 후의 지구의 풍경을 그려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인간 중에는 굉장히 강인하게 살아남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어떤 형태로든 삶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무리 중에 적어도 나는 포함되지 않겠지만.”

김종철 선생님의 이메일 편지가 10명의 “벗들에게”(제목) 동시에 도착했습니다. 6월23일 오전 10시42분이었습니다. 일찍 닥친 더위와 그 더위가 달굴 지구를 염려하며 선생님의 편지는 시작됐습니다.

“조해일씨가 세상을 떠나셨군요. 그리고 까치의 박종만씨도.”

6월19일 작고한 소설가(조해일·향년 79)와 그보다 닷새 앞서 별세한 출판인(박종만·향년 75)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대표작 <겨울여자>가 대중소설로 “오해”돼 진지한 평가를 받지 못한 작가의 영면 앞에서 선생님은 “우리 문단에는 섬세한 촉각을 가지고 좋고 나쁜 작가를 섬세히, 충분히 평가하는 전통이 부재한 게 아닌지 늘 유감스럽다”고 하셨습니다. “상업성을 따지면 엄두도 내지 못할 책들을 과감하고 꾸준히 내온” 출판인의 사망 소식엔 “쓸쓸해진다”고 쓰셨습니다.

“인생무상, 이보다 더 진실이 없지요.”

선생님은 당신의 건강 악화를 전하셨습니다.

“벌써 잠을 못 잔 지 여러 날입니다. 이명이라는 것 때문에. 원래 이명이 있었는데, 그런대로 적응해서 살아왔는데, 최근에 갑자기 음, 비행기가 가면서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그게 어느새 증폭되어, 낮이고 밤이고 단 일각도 멈추지 않습니다. 평생 소음을 지독히 싫어해온 것에 대한 형벌을 받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병원에서는 마땅한 방법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자체가 죽을병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잠을 못 자고, 온종일 신경이 쉬지 못하니 버티기가 참 만만치 않습니다. 일생 동안 제가 많이 아파봤지만, 이번에는 난감하네요.”

선생님은 부탁하셨습니다.

“결국 적응을 빨리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끊임없이 주의를 돌려야 하는데, 그게 혼자서는 잘 안 되네요. 여러분들이 자잘한 이야기라도 자주 저에게 보내주면 그걸 읽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아무 이야기라도 좋아요. 폼 잡지 말고, 그냥 기탄없이 있는 그대로 자기를 스스럼없이 표현하면서 산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절감하며 지냅니다.”

편지를 보내신 지 이틀 뒤였습니다. “벗들”이 보내오는 “자잘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이명과 싸우시던 선생님의 사망(향년 73)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벗들”은 땅이 흔들리는 충격으로 얼어붙었습니다.

김종철 발행인이 2005년 1월11일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구간 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네번째 단식 중인 지율 스님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승화 &lt;한겨레21&gt; 기자
김종철 발행인이 2005년 1월11일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구간 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네번째 단식 중인 지율 스님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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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리저리 궁리할 것 아닙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선생님은 글을 쓰셨습니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이명을 견디며 몰두하신 일은 유례없는 재난에 대한 파악과, 성찰과, 모색이었습니다. 재난의 실체와, 원인과, 이후에 가닿으려는 사고의 조각들이 이 세계에 남긴 선생님의 마지막 언어들이 됐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거의 반강제적으로 칩거 상태로 지낸 지 벌써 몇 달이 되었군요. 저는 원래 이런 생활에 익숙한 사람인데도, 때때로 갑갑증을 느낍니다.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계절이면 지독한 미세먼지로 괴로움을 겪던 것을 생각하면 이 상황이 종결되고 또 그 지옥으로 되돌아가면 어떻게 하나, 그런 두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 이 와중에, 책상 위에 늘 흩어져 있는 종이들이나 노트들에 이것저것 떠오르는 상념들을 즉흥적, 단편적으로 적어놓았는데, 며칠 전 우연히 그것들을 대충 훑어보니 버릴 게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여러분과 나눠봐도 될 만한 이야기들이 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코로나 일지를 시작하며)

선생님은 오랫동안 두개의 모임에서 후배들을 만나오셨습니다. 영남대학교 교수직을 그만둔 2004년 ‘이반 일리치 읽기 모임’을 시작하셨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녹색평론사 사무실에서 일리치(오스트리아 사상가)의 글을 나누던 모임은 만남의 주기와 장소를 달리하며 지금까지 이어져왔습니다. ‘김밥모임’(김종철 선생님과 밥 먹는 모임)은 2007년 출발했습니다. 두달 간격으로 <녹색평론>이 나오면 만날 날을 잡아주셨습니다. 시인(김해자·정우영·황규관)과 소설가(김남일), 문학평론가(고영직·노지영·오창은·이명원), 정치학자(하승우), 출판인(김선정), 기자(손제민·이문영) 등이 선생님께 밥과 술을 얻어먹었습니다. 일체의 권위를 싫어하신 선생님은 20~30년 어린 후배들과도 격의 없이 대화하고, 귀 기울여 듣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는 메모하셨습니다. 새로 읽고 공부한 내용을 나누실 때 가장 기운 넘치고 신나 하셨습니다. 그 기운을 받으며 후배들은 지난 13년간 선생님 곁에서 나이를 먹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는 통권 170호가 발행된 지난 1월 이후 김밥모임도 멈춰 세웠습니다. 소소한 만남조차 차단된 현실이 선생님의 이명을 키우고 있을 줄 후배들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김종철 발행인의 2005년 모습. &lt;한겨레&gt; 자료 사진
김종철 발행인의 2005년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선생님은 지난 5월24일에도 단체 메일을 보내셨습니다. ‘코로나 일지’가 첨부돼 있었습니다. 일리치 읽기 모임 카페에 올리신 글을 “심심할 때 구경하시라”며 김밥모임에도 공유하셨습니다. ‘일기’가 아니라 ‘일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일기는 쓰지 않습니다. 지금도 마음이 허전할 때 가끔 들춰보는 타르코프스키의 일기 같은 것을 보면, 저 자신도 일기를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은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에게는 맞을지 모르지만, 나 같은 인간은 일기를 쓰면, 그 일기라는 것은 매우 위선적이고 거짓된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 정도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세상에서 제일 혐오스러운 것 중의 하나는 출판을 의식하며 쓴 일기입니다. 그런 일기를 쓰는 개인은 일기를 씀으로써 좀 더 정직하고 열린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에고(ego)에 더욱더 갇히게 된다고 저는 봅니다. 노골적인 나르시시즘의 표출이 왜 문제냐 하면, 그게 부도덕해서가 아니라, 미학적으로 보기 흉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제가 가끔 종이에 휘갈겨 적는 것은 어디까지나 낙서이지 일기가 아닙니다. 왜 지금 낙서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득 이 낙서들 중에서 그래도 쓸 만한 이야기가 있다면, 여러분들이나 저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심란한 시간을 버티고 이겨내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코로나 일지를 시작하며)

모두 6개의 파일이었습니다. 이 글들과 이후 추가로 보태신 글들이 선생님의 손을 거친 마지막 <녹색평론>(7·8월호)에 ‘코로나 시즌, 12개의 단상’이란 제목으로 묶였습니다. “서문을 쓰려는데 이 증상(이명)이 나타나는 바람에 쓰지 못했다”며 일지가 서문을 대신한 까닭을 선생님은 작고 이틀 전 메일에서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당부하셨습니다.

“인생, 그거 너무 이리저리 궁리할 것 아닙니다. 사람은 모두 다 똑같아요. 다 어린애죠. 이 난경에 처해보니, 뼈저리게 알겠습니다. 평소 건강할 때 사람들에게 충분히 배려하고, 관심을 베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여러분은 후회 없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김종철 발행인의 손을 거친 마지막 &lt;녹색평론&gt;(통권 173호).
김종철 발행인의 손을 거친 마지막 <녹색평론>(통권 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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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는 감염병의 역사”

이명을 잊을 ‘글의 대화’를 청하시는 편지를 받고 김밥모임 후배들은 ‘이상하게’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시인 황규관(<삶이 보이는 창> 편집인)의 회신이 가장 빨랐습니다. 메일 수신 한시간 뒤(6월23일 오전 11시42분)였습니다.

“코로나 이후 출판계의 양극화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 요즘에는 저도 참 괴롭습니다. 삶창 하면서 주위에 신세를 많이 졌는데 그것 못 갚고 그만두면 어쩌나, 이런 불안이 자주 듭니다….”

그가 전한 문학판 소식에 선생님은 “서양어의 번역말을 쓰기 시작한 한국 근대 100년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적어도 일본 사람들은 생소한 서양어를 자기 나름으로 번역하면서, 말하자면 서양과 일대 대결을 하고, 고투를 한 역사를 경험했는데, 우리는 그 과정을 생략하고 당연한 듯이 일본 사람들의 번역어를 그대로 받아썼으니, 서양정신과의 대결 경험이 없었고, 그 없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찰해야 한다는 지적(6월23일 오후 2시1분)이었습니다.

한시간 뒤엔 소설가 김남일이 메일(6월23일 오후 3시18분)을 보냈습니다. 조해일·박종만 두분의 소설과 출간도서를 읽으며 통과한 젊은 날을 회고하며 선생님의 건강을 걱정했습니다.

“실은 지난 시절, 저도 아마 등 떠밀려 광장으로 가고는 있었지만, 마음은 얼른 골방으로 들어가 좋아하는 책이나 실컷 읽었으면 하고 자꾸 망설이고 주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놓친 세월에도 이제 먼지가 켜켜이 쌓였습니다.”

선생님은 이튿날 오전 “응원해줘 고맙다”(6월24일 11시50분 회신)고 하셨습니다.

“남일씨처럼 욕심 없이 좋은 소설, 책들을 읽으며 평온한 마음으로 사는 게 제일 부럽습니다. 최소한 생계만 꾸릴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후회해봤자 소용없지만, 지나간 날들을 많이 돌아보고 있습니다. 견뎌볼게요.”

김남일의 편지 10분 뒤 문학평론가 노지영의 메일(6월23일 오후 3시29분)이 선생님께 갔습니다. 그는 ‘폼 잡지 말고’ 소식 전해달라는 선생님의 글에 일부러 “미주알고주알 잡다한 이야기”로 회신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동네에 ‘개발 바람’이 불며 공동체가 쪼개지는 과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했습니다. 지난해 그 동네를 방문한 적 있는 선생님의 답장(6월23일 오후 6시37분)엔 개발을 주도하는 “출세하고 성공했다는 인간들의 빈약한 정신”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어려 있었습니다.

“맑은 하늘 밑에 사람들이 소박하게 생활하는 곳, 빈터에서 아이들이 아무 걱정 없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그런 곳이야말로 낙원인 줄 모르고, 그냥 돈 몇 푼 생기는 게 목표가 된 사람들의 세상, 참 끔찍합니다. 요새는 그냥 사람들이 모두 불쌍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맘이 약해져서인지, 어쩔 수 없다는 체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혹은 어쩌면 ‘고향’을 잃어가고 있다는 상실감으로 너무 오래 속을 썩여온 끝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김종철 발행인의 2008년 모습.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김종철 발행인의 2008년 모습.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문학평론가 이명원(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의 응답은 날짜가 바뀐 직후(6월24일 오전 1시2분)였습니다. 그는 코로나 시대에 카뮈의 <페스트>를 두고 쓴 글을 “선생님의 이명을 잠깐 잊게 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첨부했습니다. 선생님은 답신(6월24일 낮 12시17분)에서 그 글을 칭찬하며 최근 “나도 <페스트>를 다시 읽어보려고 꺼내놓았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대학생 시절 처음 <페스트>를 읽었을 때는, 그때는 카뮈를 늘 사르트르와 비교해서 읽는 풍토였던 탓도 있겠지만, 이 소설이 파시즘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생각하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 나도 동조했고, 그래서 역병과 파시즘이라는, 전혀 성격과 차원이 다른 문제를 그런 식으로 다룬다는 것에 대한 저항감 때문에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이었지요. 더욱이 그 당시 불문학자 김붕구 선생 같은 분(반공주의자)이 늘 카뮈와 사르트르를 대비시키면서 사르트르를 비난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발도 아마 있었던 것 같소. 그러나 역시 카뮈는 좋은 작가임에 틀림없소. 다만 알제리 식민해방투쟁에서 카뮈가 별 역할을 하지 않은 데는 아직 의구심이 남아 있지만.”

선생님도 ‘코로나바이러스 습격’의 의미를 묻는 재료로 페스트를 불러오셨습니다.

“이번에 새삼 느낀 것은 세계사는 질병의 역사, 그중에서 특히 감염병의 역사라는 점이다. 몽골제국이 망한 것도 결국은 페스트 때문이고, 유럽 중세 질서가 해체된 것도 결국은 페스트 창궐의 여파였다. 게다가 실크로드가 폐쇄된 것도 페스트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렇게 보면, 맑스주의 역사관에서 말하는 생산력의 발전이니 교역의 확대니 하는 것들은, 역사적 변화의 주된 요인이라기보다 실은 부차적인 요소로 봐야 하지 않을까.”(코로나 일지)

“정부의 재난지원금이라는 거
이참에 항구적인 제도 됐으면
이론투쟁 활발해져야 하는데 답답”

“때가 되면 다 떠나야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앓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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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공급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

선생님은 이 세계의 근본적 전환을 쉼 없이 호소하셨습니다. 혁명 없는 시대에 가장 혁명적인 사상가셨습니다. 구호가 아닌 대안을 내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읽고, 쓰고, 행동하셨습니다. “온종일 신경이 쉬지 못하는 중에도” 선생님의 생각이 끝까지 더듬고자 했던 것은 전 지구적 감염 시대로 진입한 이 세계의 미래였습니다.

“지금까지 (국내외의) 언론과 지식분자들이 쏟아내는 견해나 주장들은 대부분 소비활동 위축, 수요 급감에 따른 경기후퇴에 관한 우려와 그 해결책에 관한 제안들에 국한되어 있다. ‘그린뉴딜’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으나, 그것도 대부분 경제성장 논리와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코로나 일지)

김종철 발행인이 2012년 2월12일 녹색당 서울시당 창당대회에서 축하 인사를 하고 있다. 그는 ‘녹색당 전임강사’를 자임했다. 연합뉴스
김종철 발행인이 2012년 2월12일 녹색당 서울시당 창당대회에서 축하 인사를 하고 있다. 그는 ‘녹색당 전임강사’를 자임했다. 연합뉴스

작고 한달 전 메일에선 치열한 논쟁의 시급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나마 저는 (연금 덕분에) 이런 ‘고독한’ 생활이 가능하지만, 타인들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이 없으면 생활이 곤란해질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 걱정을 안 할 수 없습니다. 정부지원금이라는 거, 우리 집도 받아서 쓰고 있습니다만, 이참에 항구적인 제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이론투쟁이 활발해져야 하는데, 아직도 기본소득론자들도 대부분 증세나 세수 조정을 통한 재원, 혹은 좀 더 진전된 생각으로는, 토지보유세를 통한 재원 확보라는 생각에 머물고 있어 답답합니다. 은행을 국유화하거나 엠엠티(MMT·Modern Money Theory: 국채 발행이 아니라 국가가 돈을 찍어 재정을 충당해야 한다는 ‘현대화폐이론’은 최근 미국 진보정치 진영에서 그린뉴딜의 재원 조달 방안으로 재조명)를 적용하면 간단한데, 왜 우리나라에는 그런 공부를 한 경제학자가 없는지, 설혹 있다고 해도 용기 있게 발언하는 사람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저녁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기본소득론자와 반대론자 간의 맞토론을 보았는데, 거기서도 결국은 ‘한정된 국가수입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쓰느냐’는 게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국가가 마련할 수 있는 돈이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에 양쪽 다 고착되어 있는 거죠.”

엠엠티를 주제로 칼럼을 쓰려고 공부 중이던 기자 손제민(<경향신문> 사회부장)은 “뵙게 되면 듣고 싶은 말씀이 많다”며 조언을 구했습니다.

“화폐를 보는 패러다임 전환이 생태위기 해소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독자들에게) 풀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5월28일 낮)

선생님은 답장(5월28일 오후)에서 “(엠엠티를) 잘만 적용한다면 획기적인 경제정책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를 표하셨습니다.

“엘렌 브라운(<부채의 덫> 저자)이 제창하는 공공은행 운동도 그래서 늘 관심 갖고 보고 있는데, 브라운이 작년 가을에 전주시가 개최한 심포지엄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요즘 뒤늦게 알고 자료집을 구해서 읽어봤소. ‘한국의 경제 기적’이 가능했던 배경으로 (박정희 시대의) 한국의 은행들이 국유였다는 점을 주요 요인으로 지적하던데, 별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소. <녹색평론> 다음 호에 재정 건전성이라는 것은 미신일 뿐이다, 화폐공급이란 궁극적으로 경제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다, 라는 이야기를 부각시키고 싶소.”

이 문제의식은 ‘균형재정론은 틀렸다’(홍기빈)는 글로 7·8월호에 실려 선생님의 장례 기간 중 정기구독자들에게 배달됐습니다.

“마흔에 접어들면서 갑상선 종양 진단을 받고 여러 달 후 수술을 받기까지, 나는 사람이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에 빠져 지냈다. (…) 불교책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마음의 평정을 얻는 데에는 산책이 더 효험이 있었다. 집 근처의 개천 길이나 산길을 몇 시간씩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길가의 풀들에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 풀들도 인간과 다를 게 없는 생명체였다. 함부로 밟을 수가 없었다.”(코로나 시즌, 12개의 단상)

6월25일 새벽 선생님은 새와 물 소리로 이명을 덮으려 이른 산책을 나가셨습니다. 무엇 하나 함부로 밟을 수 없는 생명들을 피해 걸으시다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전날 저녁(8시47분) 황규관에게 도착한 메일이 선생님의 마지막 메시지였습니다. 그가 ‘읽을거리’로 보내드린 에세이 한 편(‘장마’)에 대한 격려였습니다.

“고마워. 앞으로 이런 글 많이 쓰라고 권하고 싶네. 괜히 어려운 소리 하지 말고. 고향을 잃고, 잃어가는 슬픔과 고통을 솔직히 나누는 게 문학의 본질 아닌가 싶어. 때가 되면 다 떠나야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앓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말이야.”

3시간 전(6월24일 오후 5시25분)엔 시인 김해자에게 편지를 쓰셨습니다. 잠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물으시며 “고맙다”고 하셨고, 안 그래도 아픈 사람에게 “내 고통만 이야기해서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김종철 발행인이 지난해 평론집 &lt;대지의 상상력&gt;을 냈을 때의 모습.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김종철 발행인이 지난해 평론집 <대지의 상상력>을 냈을 때의 모습.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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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밟을 수 없었다”

일리치 읽기 모임과 김밥모임이 주관한 작은 추도식이 6월26일 저녁 빈소 한켠에서 열렸습니다. 김해자가 조시를 낭송했습니다.

“세계가 죽음을 향해 나자빠지는 소용돌이 속에서/ 비행기 바퀴 구르는 소리가 일각도 멈추지 않는 이명/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만이 아니라 대지가 온몸으로 절규하는 귀울음.”

재난 앞에서 터진 약한 생명들의 울음이 그들의 소리에 누구보다 예민했던 선생님의 귀로 달려가 차곡차곡 쌓였을 것입니다. 시인 정우영은 선생님의 이명을 “지구가 깨지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온몸에 받아 홀로 삭인 이”가 떠난 뒤 남은 자들의 세계는 그 울음들에 귀 닫고 득의양양할지도 모릅니다. 지난 5월 띄운 편지를 맺을 때 선생님은 쓰셨습니다.

“이 세계는 그냥 이대로 망해 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너무 아깝습니다.”

문학평론가 오창은(중앙대 다빈치교양대학 교수)은 김밥모임의 총무로 매번 선생님과 만날 날짜를 조율해왔습니다. 그가 선생님을 운구한 뒤 썼습니다.

“(몸이) 너무 가벼워, 나비처럼 자연의 일부가 되어 날아가신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사주신 밥, 대략 70끼니가 넘는 것 같습니다. 밥값 하는 삶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빈자리는 무엇으로 메꾸어야 합니까?”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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