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8일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특별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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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나의 생명체이며, 따라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에도 생태계의 원리가 작동한다. 자연생태계가 그렇듯 언어도 살아남고 우위에 서려면 진화를 해야 한다.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언어정책의 가장 큰 목표는 새말심(조어력) 향상이어야 한다. 그래야 어휘와 문법이 풍부해지고 외래어 유입도 줄일 수 있다. 현행 표준어규정은 생태학적인 관점이 매우 부족하며 새말심 향상에 무관심하다.
현재의 국어정책을 보면, 규칙을 정하여 변화하지 못하게 하면 헷갈리지 않고 편해질 거라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어쩌면 100년도 넘게 써왔을 ‘바램’을 본말이 ‘바라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바람’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렇다면 본말이 ‘하다’니까 ‘사랑하’, ‘사랑하보다’, ‘사랑하봄직하다’라고 해야 하나? ‘야, 빨리 이거 하!’ 이래야 하나? ‘바람’이 맞다는 주장의 논리가 본말이 ‘바라다’라는 것밖에 없기에 하는 말이다. 어쩌면 ‘사랑해’의 ‘해’는 어원상 ‘하여’가 줄어서 되었다는 둥 이런저런 차이를 들어 ‘바래’와는 다르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어감이 다른 ‘하라’, ‘해라’, ‘해’ 등의 형태까지 모두 설명해주는지는 의문이다. 또 ‘노라지다’, ‘하야지다’는 왜 오히려 틀리고 ‘노래지다’, ‘하얘지다’가 맞다고 하는 걸까. ‘나무라다’가 기본형이라 ‘나무래다’는 안 된다는데, 요즘 “쟤 좀 나무라/나무라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언제까지 티끌 같은 차이를 찾아내 계속 합리화할 것인가.
본말의 형태와 달라지는 가장 큰 원인은 ‘기능적 압력’(functional load)이다. 새로운 기능을 표현할 말이 필요한 상황을 가리킨다. ‘머리’(頭)와 어원이 같은, 동물을 셀 때 쓰는 ‘마리’가 그 한 예이다. 사람이 아닌 것을 세는 새로운 기능의 말을 쓰고 싶은 마음에서 본말의 모음만 살짝 바꾼 것이다. ‘작다’와 ‘적다’, ‘숨’과 ‘쉼’, ‘그림’과 ‘그리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신체의 한 부분인 ‘목’에서 ‘모금’, ‘먹다’, ‘머금다’ 등이 파생되었다. ‘불’(火)에서 ‘붉다’, ‘밝다’, ‘불그레하다’, ‘벌겋다’ 등이 생겨났다. 그럼 ‘물’(水)에서 어떤 말들이 생겨났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묽다’, ‘무르다’, ‘맑다’, ‘멀겋다’ 등이 나왔다. 새로운 문법을 낳은 예로는, ‘보다’와 ‘가다’가 보조용언으로 사용된 ‘생각해보다’, ‘저물어가다’ 같은 말들이 있다. 하루아침에 생겨난 말들이 아니다. 긴 세월의 진화로 생겨난 것이며 혼란을 초래한 게 아니라 발전을 한 것이다. 지금처럼 시간을 정지시키고 ‘본말’이나 따지고 있었다면 결코 생겨날 수 없었을 말들이다.
헷갈림도 변화를 촉발한다. ‘네’와 ‘내’는 원래 발음대로라면 혀의 높이에서 차이가 난다. ‘네’의 혀는 중간 높이이고, ‘내’는 그보다 낮은 위치에서 발음된다. 혀가 낮아지려면 입을 더 크게 벌려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귀찮아졌는지 입을 덜 벌려, ‘내’의 혀 위치가 조금씩 위로 올라가게 되었고 종국에는 ‘네’의 위치까지 올라가버렸다. 일상에서 수없이 자주 쓰는 ‘네’와 ‘내’인데 구별이 잘 안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네’는 ‘내’를 피해 혀를 더 높이 올려 ‘니’가 되었다. 이 자연스러운 언어현상을 끝내 거부하고 ‘니’를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다 보니 풍선효과로 ‘니가’ 대신 ‘너가’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져버렸다.
‘바램’과 ‘바람’ 사이에는 유사한 도상성(圖象性, iconicity)이 있어서 ‘바람’으로 통일하면 헷갈릴 수 있다. ‘이것이 국민의 바람이다’에서 ‘바람’은 두 의미 사이에서 묘하게 헷갈리는 느낌을 준다. 디즈니 영화 <포카혼타스>의 주제가 ‘컬러 오브 더 윈드’(Colors of the Wind)의 바람에는 강한 ‘바램’이 담겨 있다. 한편, ‘바라보다’의 활용인 ‘바라본다’, ‘바라봄직하다’ 같은 말 때문에도 헷갈린다. 기본형이 ‘바라다’인 이상 ‘바램’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 헷갈림 때문에 ‘(하길) 바라본다’, ‘(하길) 바라봄직하다’는 사용을 피할 것이다. 결국 이런 회피로 인해 우리는 ‘바래본다’, ‘바래봄직하다’ 같은 말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굳이 정할 필요 없는 규정(인조문법)을 정하여, 그 규정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주객전도의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바래’를 표준어로 인정하면 ‘같애’, ‘나무래다’처럼 다른 유사한 경우도 인정해야 해서 어미체계가 복잡해진다는 주장도 있는 듯하다. 하지만 복잡함 자체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 복잡하지 않은 언어는 없다. 입에 이미 달라붙은 말을 쓰지 말라 하니까 언중의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진짜 복잡함의 원인은 현행 규정에 있다. 지나치게 배타적이며, 마치 유무죄를 결정하는 형사법 같다. 유연성이라곤 오랫동안 “쓰지 마라” 하다가 어느 날 큰 인심 쓰듯 “그래, 이제 너도 맞다 해줄게” 정도가 다다. 이마저도 역설적으로 언중이 규정을 위반하며 계속 쓸 때 가능하다. 실제로 그럼으로써 표준어 사전에
오를 수 있었던 말이 ‘귓속말’, ‘구닥다리’, ‘뜬금없다’, ‘메꾸다’, ‘영글다’, ‘푸르르다’, ‘까탈스럽다’ 등이다. ‘깡총깡총’은 의태어임에도 아직도 그곳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사전이라는 것이 올리라고 있는 건데, 배척의 잣대가 되어 있는 것이다. 변화를 오염으로 여기는 것이다.
본말의 형태에서 벗어나는 일탈은 오히려 새말심의 큰 원천이다. 헷갈림은 규칙에 대한 강박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규정대로 사용하다 보면 결국 익숙해지게 되어 있다는 생각은 언중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드는 것이다. 언어는 대단히 복잡하지만, 역설적으로 복잡하기 때문에 어휘와 문법이 풍부해진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복잡해지는 언어는 없으며, 과하게 복잡해지려 하면 언중이 알아서 조절하게 되어 있는 게 언어다. 작금의 표준어규정으로는 우리말을 분재(盆栽)로 키울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 마을의 수호신 같은 정자나무로 키울 수는 없다.
손중선 대구교대 교수(영어교육학·언어학 박사)
※손 교수는 지난 10월8일치 <한겨레S> 커버스토리 ‘표준국어대사전은 진짜 표준?’ 기사와 관련해 언어의 일탈을 허용해야 한다는 취지의 원고를 보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