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조선 최고의 학교는 성균관이다. 각 지방 군현(郡縣)에는 향교, 한성부에는 사학(四學)이 있고, 그 위에 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학교가 있으니 바로 성균관이다. 성균관의 학생들 곧 유생들은, 학비와 기숙사비, 식비가 모두 무료다. 지필묵을 비롯한 학용품도 모두 무료로 지급한다. 학생들로부터 등록금을 전혀 받지 않았으니, 명실상부한 최고의 국립대학이다. 굳이 견주어보자면 성균관은 등록금 안 받는 서울대학교인 셈이다(지금의 성균관대학교는 사립대학이니까 과거의 성균관과 같지 않다).
성균관의 운영자금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따로 책정한 교육예산에서 나오는 것인가. 답은 좀 엉뚱하다. 성균관을 둘러싼 마을을 반촌이라 하고, 반촌에 사는 사람들은 반인(泮人)이라 한다. 반인은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인데, 원래 고려 말기 안향(安珦)이 기증한 노비의 후손들이다. 반인은 반촌을 떠나서 살지 못하고, 또 반촌 일대에는 농경지가 없다. 상업에 종사하는 것도 금지다. 그럼 무얼 먹고 사는가?
반인은 쇠고기를 판매하는 가게를 운영한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돌아가면서 성균관의 오만 가지 노동에 복무했다. 반인은 현방(懸房) 혹은 ‘다림방’이라 불리는 약 20곳의 정육점을 경영하였다. 물론 서울 시내에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조선시대의 법이 소의 도살을 금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단지 자연사 혹은 사고사 한 소의 고기를 관(官)에 신고하고 먹을 수 있었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법이지만, 어쨌든 소의 도살은 법으로 금지된 것이었다. 유일하게 소의 도살을 허락 받은 사람이 반인이었다.
반인을 성균관에 묶어놓기 위해서 조선 정부는 그들의 생계를 마련해 주었어야 하였다. 그 생계 수단이 곧 소의 도살과 쇠고기의 판매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법을 어기는 ‘범죄’였기에 사헌부·형조·한성부 등 세 사법기관에 벌금, 곧 속전(贖錢)을 내어야만 하였다. 반인들로부터 뜯어낸 속전은 이 사법기관 소속 하위 공무원들의 월급으로, 경상 잡비로 지급되었다. 속전의 규모가 워낙 컸기에 반인은 거의 이익을 남기지 못했다.
성균관은 원래 지방 각지에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 토지의 지대를 운영자금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임병양란 이후 궁방(宮房)과 힘 있는 아문들에게 토지를 거의 다 빼앗기고 빈손이 되어 있었다. 한편 재정의 또 한 축이었던 외거노비의 신공(身貢) 역시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성균관 역시 급기야 현방의 돈을 털어 운영자금으로 쓰기 시작했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365일 이용하는 기숙사와 식당의 운영자금, 정기적으로 지급받았던 지필묵, 하다못해 복날에 먹었던 개장국까지 모두 노비들로부터 수탈한 노동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노비들은 몸을 갈고 고혈을 짜내어 성균관과 사법기관을 먹여 살렸다. 하지만 그 기관들이야말로 그들에 대한 일방적 착취를 가능케 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영속화하는 장치들이었다. 노비들은 자신들이 성균관과 사법기관들을 먹여 살리는 행위 자체가 자신들에 대한 영원한 착취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 반인에 대한 자료를 훑어보다가 어쩌면 반인들이 속전을 바치던, 아니 뜯기던 상황은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진행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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