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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왕의 ‘행장’

등록 2020-11-27 04:59수정 2020-11-27 10:22

조선 제18대 국왕 현종 12년에 아들인 왕세자 숙종이 세자빈을 맞이한 과정을 기록한 <숙종인경왕후가례도감의궤>(1671,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제18대 국왕 현종 12년에 아들인 왕세자 숙종이 세자빈을 맞이한 과정을 기록한 <숙종인경왕후가례도감의궤>(1671, 국립중앙박물관).  

[책&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당쟁은 사족끼리 정치권력을 두고 벌이는 전쟁이다. 그런데 그것은 기본일 뿐이고, 세상사 단순하지 않아 그 싸움에 왕이란 존재가 끼어들어 문제가 복잡해진다. 당쟁이 가장 격렬했던 숙종대의 경우를 보자. 1689년 서인이 축출되고 실각했던 남인이 정권을 잡는다(기사환국). 5년 뒤 갑술환국(1694)이 일어나자 남인은 하루아침에 쫓겨나고 서인이 복귀한다. 이후 남인은 다시는 권력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두 차례 환국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집안이 결딴이 났다. 그런데 그 환국 소동을 벌인 주체는 다름 아닌 국왕 숙종이었다. 29살의 젊은 왕은 후궁(장희빈)을 사랑한 나머지 그녀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을 세자로 세우는 데 반대한 서인들에게 사약을 안기기도 하고, 귀양지에서 죽게 만들기도 하였다. 5년 뒤에는 남인이 꼭 같은 일을 당했다. 나라의 권력을 한 손에 쥔 젊은 사내의 애정놀음에 애꿎은 사람의 목숨이 떨어지고 가문이 몰락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숙종실록의 마지막에 숙종의 ‘행장’(行狀)이 실려 있다. 그의 일생을 정리한 것인데, 읽어보면 인군(仁君)도 그런 인군이 없다. 그는 백성을 그지없이 사랑하는 왕이었다. 하지만 숙종실록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실상은 판연히 다르다. 수탈에 시달린 백성들이 땅을 잃고, 유리걸식하고, 급기야 떼강도가 되어 살아야 했지만, 숙종은 그것을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무능한 왕이었다. 행장은 기사환국·갑술환국이 젊은 사내의 애정놀음이 일으킨, 희비극이라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는다. 행장이 거짓말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행장의 주체가 왕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예외적인 한둘을 제외하면, 왕은 신하들보다 머리가 좋은 것도, 현명한 것도, 높은 학문이 있는 것도, 윤리의식이 충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보통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그가 왕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읽을 때 그저 그런 인간인 왕에게 무언가 허락을 받으려고 굽신거리는 신하들의 꼬락서니를 보고는 정말 실소하게 된다. 정말이지 인간의 역사에서 왕이란 존재를 만들어낸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왕이 없다. 물론 입헌군주국이 있지만, 과거처럼 절대왕권을 휘두르는 왕은 없다. 하지만 없어진 것은 ‘왕’이란 명사일 뿐이다. 왕은 모습을 바꾸어 지금도 군림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은 돈에서 나온다. 돈을 절대적으로 많이 소유

한 사람은 그 돈으로 사람을 부릴 수 있다. 모두들 그를 왕처럼 보고 왕처럼 모시고, 그 역시 왕으로 행세한다. 왕위는 당연히 세습이다. 내수사(內需司, 왕의 개인 재산을 관리하는 관청)의 토지와 노비 역시 세습된다.(상속세 따위는 당연히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왕이 죽으면 과거에 실록이 그랬던 것처럼 언론에서는 그의 찬란한 행적을 늘어놓으며 행장을 쓴다. 죽은 왕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소유할 수 있었는지, 그 돈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 하는 것 따위는 묻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는 진실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상 소수의 왕들이 다스리는 왕정국가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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