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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과거에 일곱 명 붙었으니 도둑놈도 일곱

등록 2020-12-25 04:59수정 2020-12-25 08:22

[책&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김간(金榦, 1646~1732)은 숙종 연간의 꽤나 유명한 학자다. 이분의 문집 <후재집>(厚齋集)에 ‘수록’(隨錄)이란 글이 있다. 문자 그대로 머릿속으로 궁리하던 이런저런 생각, 경험한 일, 전해 들은 이야기 등을 자유롭게 쓴 토막글을 모은 것인데, 의외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중 한두 이야기를 소개해 본다. 모두 과거(科擧)에 관한 것이다.

김간은 조선이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은 과거가 유일하다고 한다. 물론 별천(別薦)이라 해서 추천하는 길도 있다. 그런데 과거는 해마다 치고 한 해에 서너 차례 치는 경우도 있지만, 별천은 10년, 20년에 겨우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다.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마저도 당쟁(黨爭)의 격화로 인해 인재를 추천할 때도 자기 당파가 아니면 아무리 탁월한 인재라도 결코 추천하지 않는다. 결국 과거로 쏠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는 멀쩡했던가. 김간은 자신이 전해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옮기고 있다. 어떤 시골 사람이 서울로 올라와 종로거리를 지나는데, 마침 회시(會試, 과거의 2차 시험)의 방목(榜目, 합격자 명단)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길가에 관청의 하급 관리인 서리(胥吏) 네댓 명이 앉아 있다가 그 방목을 잠깐 달래서 보더니, 그중 한 사람이 분기탱천하여 “근래 나라에서 오로지 과거 치는 것만 일삼아 1년에 두세 번씩 치르기도 한다네. 이제 이 방목을 보니, 백성을 학대하는 도둑놈 일곱이 또 나왔구먼!”이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방목의 합격자가 7명인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 이야기를 옮겨 적고 있는 김간은 도둑놈 7명이란 말을 부정하지 못한다. 근래에 문관(文官)들의 탐욕이 풍조를 이루어 백성들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서리가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이고, 그 말이 농담인 것 같지만 사실상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 김간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과거에 합격해 벼슬을 얻어도 녹봉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입에 겨우 풀칠을 할 정도였으니, 그것을 바라보고 죽으라고 시험 준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앞에 펼쳐졌다. 중앙 관서 어느 자리에서나 관례가 된 부정적 수입이 있었다. 지방 수령직은 법을 가장한 폭력으로 백성을 털고 쥐어짜서 한 재산 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조선의 사족이 목을 매고 있었던 과거는 궁극적으로 이 폭력적, 불법적 재산 마련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도둑놈 일곱!’이라는 말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던 것이다.얼마 전까지 행정고시와 사법시험이 ‘고시’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과거를 대신했다(행정고시는 ‘5급공채’로 이름이 바뀌었고, 사법시험은 2017년 폐지되었다). 시대도 제도도 달라졌으니, ‘도둑놈’ 따위의 명사를 내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즈음 예전 사법시험으로 합격해 검사가 된 분, 그리고 그들의 조직인 검찰의 행태를 보니, 유사한 어휘가 떠오른다. 무어냐고? 왜 있지 않은가, 조직을 만들어서 폭력을 행사하며 선량한 시민의 돈을 뜯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 말이다. 다가올 새해에는 제발 그만 좀 보자꾸나!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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