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응립(應立)은 타고난 의원이었다. 선생과 책을 통해 배우지 않고 대부분 자득한 의술이었지만, 그의 의술은 병자 치료에 더할 수 없이 탁월하였다. 당연히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응립을 찾았다. 그가 사는 마을은 환자들로 늘 북적였다. 응립은 그들을 모두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하였다. 자신을 찾는 환자 때문에 마을에 폐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집 안팎이 불결한 병자들의 신음소리로 가득하였다. 보고 듣기에 좋을 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써 고개를 돌렸지만, 응립은 싫은 내색 한 번 보이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었으니 병자의 치료와 간호에 지극 정성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밥 한 끼를 먹는 동안 병자를 보기 위해 열 번이나 자리를 뜨는 경우도 있었으니, 어지간히도 성실하고 무던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를 찾은 병자들은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치료가 끝나면 간혹 선물로 감사한 마음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는 지푸라기조차도 받지 않았다.
한 번은 어떤 부자가 치료를 받고 완쾌되자 그의 아내에게 몰래 돈을 보냈다. 뒷날 응립은 돈을 받은 사실을 알고는 “이 길을 열 수는 없는 일이지”라고 하며 소를 한 마리 사서 부자에게 돌려보냈다. 부자의 돈을 받게 되면 가난한 병자들이 자신을 찾아올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병자에게서 어떤 재물도 받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 부자건 빈자건 그에게는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응립은 필요한 물건이 있어 시장에 갈 때도 낮에는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답이 엉뚱하였다. 시장은 숱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니 치료를 받기 위해 자기 집에 내왕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또 그들은 고맙고 반가운 마음에 술과 안주를 마련해 자신을 대접하는데, 자신은 먹고 마시는 일로 그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개결(介潔)한 인품이 아닌가.
의술은 병을 치료하고 병자의 고통을 더는 일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병자를 외면해서도 안 되고, 어떤 이유에서도 병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어떤 의원에게는 이 상식은 상식이 아닌 것 같다. 대한의사협회 회장 최대집씨가 의료법 개정안을 문제 삼으며 코로나 백신 접종에 협조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을 보고 떠오른 생각이다. 조리를 갖춘 설득과 토론이 아니라, 사람 목숨이 달린 일로 으름장을 놓다니, 천박하기 짝이 없다.
응립은 권구(權榘, 1672-1749)의 <천유록(闡幽錄)>에 실린 인물로 경상도 예천 장씨(張氏) 집안의 사노(私奴)였다. 남의 집 종이었지만, 자신의 의술로 오직 이타적인 삶을 살았기에 기록에 남은 것이다. 의학적 지식과 사회적 지위로 따지자면 최대집씨는 사노 응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난 분이다. 하지만 인품과 이타적 삶의 자세는 응립의 발바닥에도 못 미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를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의사 선생님들, 늘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하지만 부디 그 유별난 특권의식은 버리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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