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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연과 마주할 권리

등록 2021-03-05 04:59수정 2021-03-05 12:01

일러스트 장선환
일러스트 장선환

[책&생각] 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시설사회: 시설화된 장소, 저항하는 몸들

나영정·김순남·김호수 외 지음, 장애여성공감 엮음/와온(2020)

“오늘 꽃분 할머니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었어. 한 달 동안 말을 안 하셨거든. 말씀을 못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냥 말하기 싫었던 거였어. 평생 살던 곳을 떠나 낯선 곳에 오셨으니 그럴 수 있지. 아, 할머니들이 그러는데 퇴근하는 엄마한테 창밖으로 손을 흔드는 게 유일한 낙이래. 종일 갇혀 있으니까. 그래서 퇴근할 때마다 엄마도 창문 쪽으로 손을 크게 흔들어.”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는 일터에서 겪는 소소한 기쁨과 슬픔을 들려준다. 그런 엄마가 나이 들어도 요양원에는 가기 싫다고 말했을 때 나는 짐작하면서도 이유를 물었다. “답답하잖아. 나가지도 못하고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된다고 생각해봐.” 외출, 혼자만의 시공간, 친밀감과 애정 표현, 때로는 음식과 화장실까지 제한되는데 어떻게 가고 싶겠냐고 엄마는 되물었다. 엄마를 통해 듣는 요양원의 일상은 때때로 다채로웠지만,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는 시설이었다.

시설은 평소에는 보이지 않다가 코로나 집단 감염, 시설 내 학대 문제가 알려질 때 잠시 눈에 띈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시설 내 집단 감염을 정부는 코호트 방식(동일 집단 격리)으로 대처했다. 폐쇄된 공간이어서 생긴 위기 상황에 다시 통제를 선택한 거다. 시설 내 학대를 접하면 ‘불쌍한 사람들한테 폭력이라니’ 욕하면서도, 왜 누군가 10년, 20년, 평생을 갇혀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

<시설사회>는 시설을 둘러싼 폭력의 역사와 저항하는 몸들의 이야기를 선명하게 들려준다. 시설은 멀리 있는 ‘그곳’이 아니라 친밀한 가면을 쓰고 단속하는 가족, 장애인의 이동권을 박탈하는 거리, 노숙인을 말끔히 치우는 도시, 난민을 감시하는 눈, 여성과 소수자를 배제하는 사회이기도 했다. 책을 읽는 동안 주어가 ‘그들’에서 ‘우리’로 바뀌었다. 시설은 단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연약함으로 연결된 모두가 피해갈 수 없는 차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탈시설 운동은 시설을 없애고 시설 밖에서 공존할 수 있는 구체적인 토대를 만드는 운동이다. “우리는 ‘어디에 살 것인가’라는 문제를 넘어 ‘어떤 사회에 살 것인가’라는 문제와 마주쳐야 한다.” 스물한 명의 저자는 시설이 사라진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한다. 그 세계에는 시설 밖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한 다양한 권리가 있다. 늦잠 잘 권리, 화장실 갈 권리, 머물거나 떠날 권리, 친밀한 관계를 맺을 권리. 그중 우연을 마주할 권리가 있다. ‘우연히 펼친 책에서, 우연히 간 장소에서’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나. 삶은 계획보다 무수한 우연으로 이루어진다. 아직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아 계속 요구해야 하는 권리 중에는 우연을 경험할 기회도 있었다.

시설이 없는 세계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엄마는 꽃분 할머니를 매일 보지 못할 거다. 할머니는 붙박이장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을 테니까. 통제된 운명이 아닌 열린 우연을 마주할 자유가 있을 테니까. 두 사람은 벽 너머가 아닌 거리에서 서로 갈 길을 가며 스치듯 인사한다. 꽃분 할머니는 휠체어를 이용하거나 걸음이 느려도 속도에 상관없이 자기 길을 갈 수 있고, 돌아갈 집과 사회의 품이 있다. 나는 엄마에게 이 책을 같이 읽자고 말했다. 매일 저녁 할머니에게 힘껏 손 흔드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함께 읽고 싶다고.

홍승은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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