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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현대 의학의 한계를 똑바로 보기 위하여

등록 2021-03-19 04:59수정 2021-03-19 09:45

[책&생각] 정인경의 과학 읽기

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

김준혁 지음/계단(2021)

“절망으로 가득하고/ 이룬 것 없는/ 내리막에서/ 새로운 깨달음이 온다.”

의사이며 시인이었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쓴 ‘내리막’의 한 구절이다. 그는 “그것은 절망의 역전”이라고 말한다. 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 <패터슨>이 윌리엄스의 삶과 시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시는 <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에서 소개되는데 이 책에서 글쓰는 치과의사 김준혁은 절망에 이른 현대 의학과 새로운 깨달음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과학과 의학은 한국에서 대표적인 외래문화다. 으레 과학과 의학 앞에 ‘서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는 의학과 과학을 수입해서 쓰느라 온갖 시행착오를 겪었다. 식민지 역사에서 과학기술은 우리와 애증 관계였다. 객관성과 보편성을 앞세운 과학기술이 일상생활과 삶을 억압하는 경우를 목격하며 산업화 시대를 건넜다. 최근에 터져나오는 과학기술과 의료에 관련된 사회적 문제는 분명 역사적 기원이 있다. 서양에서 들어온 것과 우리 사회에서 왜곡된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인데 김준혁의 책이 그 실마리를 풀어놓으며 핵심적인 문제를 짚어준다.

먼저 현대 의학의 정체성이다. 의료, 의술, 의학, 의업 등으로 불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현대 의학의 정체성은 과학으로 한정지을 수 없다. 인간을 직접 대면하는 의학은 과학보다 인문학에 가깝다. 그러나 18세기부터 20세기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의사-과학자’의 모델은 의료 시스템의 표준화를 낳았고, 획일적으로 의사를 길러냈다. 다양한 환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은 의료 현장에서 정신질환자,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노인의 이야기는 무시되었고 사라져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는 어떻게 환자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의사는 질병이 아닌 환자의 인간적 삶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는가? 이 책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현대 의학의 한계를 똑바로 보자고 제안한다. 의학 교육의 혁신과 의료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고 다른 의학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다음은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건강 담론이다. 현대 의학의 한계를 모르는 이들은 피 한 방울을 검사해서 모든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의료 기술이 완벽한 건강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건강이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한 사람의 건강에 개인의 생활 습관은 물론 학력, 직업, 거주지역, 문화 등 사회적 맥락이 개입한다. 이 책에서 김준혁은 소통 없이 기술로 건강한 사회가 이뤄질 수 없음을 강조한다. “우린 건강해지기 위해 할 일이 무척 많습니다.” 이 한마디가 현대 의학에 환상을 품고 손쉬운 해결책에 매달린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이 책은 서사 의학과 의료인문학의 할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최근 질병 서사의 등장이 반갑듯이 의사로서 이 땅에 건강한 삶과 좋은 의료제도를 뿌리내리기 위한 노력이 뜻깊다. 마지막 장의 “미래를 말하기 위한 작은 노력”은 시인 의사 윌리엄스가 꿈꾸었던 서사 의학, 소통의 회복, 절망의 역전으로 비춰진다.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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