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집에 시집이 가득했다. 시인이었던 아버지가 하나둘씩 모은 책들이다. 나는, 시를 쓰거나 시집 읽기를 어려워했는데 아마도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이 두려운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결국은 수많은 시인들과 친구가 되고 우리나라에서 시집을 가장 많이 내는 출판사에서 일을 했다. 우연일까? 아니면 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이세린 가이드>의 주인공, 이세린의 할아버지는 한평생 사형주조 기술자로 일했다. 알루미늄괴를 녹인 용탕을 모래 주형 안에 부어 금형을 만드는 일이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주물 기술을 배우길 바랐는데 아버지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의수족 제작자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삼남매의 막내인 이세린에겐 두 명의 오빠가 있다. 큰오빠는 아파트 분양 모형 제작사를 차렸고 작은오빠는 드라마나 영화의 특수 분장 팀에 있다. 그리고, 이세린은 전시 모형을 만들고 싶어서 취직한 회사에서 어처구니없게 음식 모형 부서에 발령을 받았고 그 일이 생업이 되었다. 꾸민 이야기이겠지만, 가족들 모두가 손재주가 대단하고, 그 재주로 모형을 만들고 있다.
디엔에이(DNA)도 모르고 유전법칙도 모르던 시절에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유전자와 유전법칙을 알아도 여전히 신비하고 오묘한 구석은 그대로 남는다. 디엔에이가 복제가 되고, 그 똑같은 디엔에이를 자손에게 물려주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발가락이 닮는 것까지는 이해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성격이나 능력까지 닮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는 빈 구석이 많다. 성격이나 능력은 그것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아서 구체적으로 부모를 닮은 것인지, 다른 영향을 받은 것인지를 칼로 자르듯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분명히 부모의 재주를 물려받은 경우도 많은데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세린 가이드>는 <미쉐린 가이드>가 아니다. 당연히 음식 레시피는 없고 아름다운 요리를 모형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재료를 골라 정성껏 만드는 과정이 담겨 있다. 플라스틱 면을 꼬챙이에 돌돌 말아 히트건으로 열을 가한 뒤 식혀 꼬불꼬불한 면발을 살린다. 튀김옷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속 재료 모형 위에 플라스틱을 깎아 만든 모형 빵가루를 부착하고 색깔을 칠할 수도 있고 왁스를 에어건으로 쏘아 질감을 낼 수도 있다. 튀김을 그대로 틀을 떠서 만들 수도 있고 물에 왁스를 떨어뜨려 질감을 만들고 그것으로 재료를 감싸는 방법도 있다.
물론, <이세린 가이드>는 흔치 않은 직업의 작은 비법을 조금 엿보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즐거움을 담고 있다. 요리를 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음식을 다룬다. 플라스틱 면에 웨이브를 만들면서 분모자(중국 당면의 일종), 콘킬리에(조개 모양 파스타의 일종), 넓적 당면 같은 동서양의 면을 훑고 장수를 뜻하는 면의 의미를 되짚는다. 꼬불꼬불한 면에서 인생의 굴곡으로, 그리고 바이오리듬으로 상념이 옮겨가더니, 일진에게 급식비를 털려 컵라면을 먹어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흔치 않은 직업을 가진, 평범한 이세린. 친척들이 다 싸 가고 나물만 남은 제사 음식을 양푼에 비벼 먹던 그의 집에선 큰오빠만 대학을 갔다. 회사에선 상사들의 무관심에 혼자 일을 배웠고, 집안에선 어머니의 와병 이후에야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이세린은 혼자 사는 집 밖에 부스럭 소리만 들려도 무서운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온갖 음식 색깔을 찾아 내야 하는 이세린은 색깔을 이렇게 기억한다. 팬톤 컬러칩 21-7U는 대만 카스텔라, 24-9U는 초당 두부, 45-8U는 진도 구기자, 4-11U는 단양 마늘, 32-16U는 영암 숭어. 그해의 패션위크에서 광천 토굴 새우젓 색깔의 드레스를 입은 모델이 걷는 것을 상상한다. 팬톤 컬러 5115U는 <이세린 가이드>. 이세린은 세심하고, 소심한 자영업자. 하지만 오래된 산삼주를 아끼다가 맛도 못 보고 가신, 담금주 마니아셨던 할아버지를 따를 생각은 전혀 없다. 면세점에 가면 알뜰하게 챙기는 비싼 양주도 서슴없이 따는 사람이다. 닮은 듯 다른 것이 역사를 이어간다.
만화 애호가
※격주에 한번,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