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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밀려난 I를 찾아서

등록 2021-04-30 05:00수정 2021-04-30 09:17

[책&생각] 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이라영 지음/문예출판사(2020)

나는 내가 없는 문장을 쓰고 싶었다. 나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딱 나만큼의 한계가 있었고, 너무 자기도취해서 쓰는 건 아닌지 의심도 들었다. 너의 이야기 말고 거시적인 글을 써보라는 조언을 듣기도 여러 번. 글쓰기 수업에서도 같은 고민을 듣는다. “제 글은 너무 ‘나’만 많은 것 같아요. 사회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싶은데 자꾸 제 이야기만 쓰게 돼요.” 나와 동료들은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서 씨름하며 글을 썼다. 글을 쓰다가 한계를 느낄 때면 책으로 도망쳤다. 나에 대한 생각을 잊고 비대해진 자아를 작아지게 만들 구원이 필요했다.

이라영 작가의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에는 생각하고 표현하는 스물한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책은 이라영 작가까지 스물두 개의 ‘나’로 이루어져 있다. 이라영 작가는 이 책이 답답하고 분노할 때마다 읽고 쓴 기록이라며 “나는 쓰는 사람이며, 동시에 읽는 사람이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책 속 그녀들도 주어와 갈등한다. 젤다 피츠제럴드는 정숙한 여성상을 거부한 ‘신여성’의 아이콘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시회를 열고 소설과 희곡을 쓴 열정적인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인 성공한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는 젤다가 글을 쓸 때마다 ‘나’를 삭제하라고 강요했다. “그놈의 ‘I’(나) 좀 집어치울 수 없어? 당신이 대체 뭔데?” 스콧은 젤다의 원고에서 ‘I’를 ‘We’(우리)로 바꿨다고 한다. 젤다의 글을 삼류라고 폄하하던 스콧은 젤다의 일기를 표절해 작품을 발표했다. 시인이자 활동가인 에이드리언 리치는 글을 쓸 때 차마 대명사 ‘나’를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는 서른이 되어서야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왜 우리는 나로 시작하는 이야기 앞에서 늘 망설이게 되는지 궁금했다. 글 쓰는 사람은 나와 불화하는 사람과 같은 말인 걸까. 모든 걸 나의 의미로 삼켜버리는 식인종 같은 ‘나’는 경계해야 하지만, ‘그놈의 I 좀 집어치우라’는 목소리는 부당하다.

코르덴 바지 느낌의 울퉁불퉁한 표지를 넘기면 두 페이지에 걸쳐 미국 지도가 나온다. 지도에는 스물한 명의 활동 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한 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맨 앞 지도로 돌아가 작가가 당시 어디에 있었는지를 살폈다. 시골에서 생활한 작가의 글에는 자연이 자주 등장하고, 국경 지대에서 자란 작가의 작품에는 난민에 관한 관심이 담겨 있다. 한 사람이 발붙인 세계는 그의 생각과 표현에 영향을 미친다. 성별, 지역, 인종과 가족관계, 성적 지향 등 그의 위치성이 고유한 글을 빚어내고 있었다.

책 159페이지에는 1991년 부산의 한 여성 노동자가 투신자살하기 직전에 남긴 문장이 적혀 있다.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고 미경이다.” 내 문장에서 밀려나는 I와 사회적으로 밀려나는 I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멀까. I를 찾아 읽고 쓰는 일이 연대의 시작이라고 책은 말한다. “우리는 개별적이면서도 서로에게 속하는 존재다.” 나의 한계는 극복할 대상이 아니라 연대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각자의 좌표에서 이야기가 흐를 때, 동일성이 아닌 다양성을 고민하는 부지런한 연대가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책을 읽은 뒤 책상에 앉으니 오랜만에 나로 시작하는 글을 쓰는 일이 두렵지 않았다.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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