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리 잉키넨 케이비에스(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케이비에스교향악단 제공
포디움(지휘대)에 선 지휘자가 지휘봉을 치켜들어야 연주는 시작된다. 때론 머리카락 휘날리며 격정적으로, 때론 눈을 지그시 감으며 섬세하게 지휘봉을 휘두르는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아름다운 선율을 빚어나간다. 같은 지휘자여도 상임이냐 객원이냐, 한국인이냐 외국인이냐 등에 따라 결이 천차만별이다. 오케스트라에 꼭 맞는 지휘자를 찾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이처럼 다채롭고 오묘한 지휘자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지난달 초까지만 해도 국내 3대 오케스트라(서울시립교향악단,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케이비에스(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중 두 자리가 공석이었다. 지방자치단체 오케스트라 중 활발하게 활동하는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도 공석이었다. 상임지휘자 선임에 관여한 한 교향악단 관계자는 “예산만 넉넉하면 상임지휘자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한정된 예산에서 실력 있는 지휘자를 찾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그런 실력자들은 주로 유럽에서 활동하는 이가 많아 선발하는 데 물리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빈자리는 한달 새 속속 채워졌다. 케이비에스교향악단은 5월11일 상임지휘자로 핀란드 출신 피에타리 잉키넨을 선임했다. 2019년 말 임기 만료된 루마니아 출신 요엘 레비 이후 2년 만이다. 부천필은 6월1일 상임지휘자로 장윤성 서울대 교수를 선임했다. 박영민 상임지휘자가 지난해 7월 임기를 5개월 남긴 채 사임한 뒤 거의 1년 만이다. 앞서 서울시향은 2019년 5월 핀란드 출신 오스모 벤스케를 상임지휘자로 선임했다. 2015년 12월 정명훈이 사임한 뒤 객원지휘자로 공연을 끌고 오다 4년 만에 빈자리를 채웠다.
오스모 벤스케 서울시향 상임지휘자. 서울시향 제공
어려운 현실에도 상임지휘자들이 속속 선임된 데는 “객원지휘자만으로 오케스트라 본연의 색깔을 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 교향악단 관계자는 말한다. 단원들의 실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찾는 쪽은 물론 제안을 받는 쪽도 ‘결단’이 필요하다. “계약은 보통 2~3년인데, 처음 1년은 단원과 호흡을 맞춰야 하니 2~3년차 때가 피크다.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내야 하니 선정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 교향악단 관계자는 말했다. 이어 “상임지휘자 선정은 진흙 속 진주를 찾는 어려운 작업”이라고 했다.
지휘자 역시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정명훈은 4월22일 기자회견에서 ‘국내에서 상임지휘자로 활동할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연주하는 거(객원)하고, 책임을 갖고 하는 거(상임)는 차이가 크다. 책임을 맡으면 오케스트라를 발전시켜야 한다. 힘든 일이다.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맡지 말아야 한다.” 당시 케이비에스교향악단은 상임지휘자 추천위원회를 거쳐 최종 후보자를 3명으로 압축했다. 정명훈도 이 중 하나였지만, 고사 의사를 밝혔다.
장윤성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부천필 제공
한 지휘자가 전한 얘기다. “상대적으로 책임이 적은 객원지휘자는 오케스트라가 좀 더 신선한 공연을 하는 데 중점을 두는 반면 상임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개성 강한 단원들과 호흡을 맞추지 못할 때도 있고, 독재자란 오명을 듣기도 한다.” 상임지휘자는 보통 1년에 10번가량 정기 공연을 한다. 그 외 특별 공연에서는 객원지휘자가 지휘를 한다.
상임지휘자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장윤성 부천필 상임지휘자의 조언이다. “우리나라는 계약이 끝날 즈음에 임박해서 뽑다 보니 제한된 풀 안에서만 뽑으려는 경우가 많다. 5~6년 정도 시간을 두고 객원지휘자로 초청해 단원과 전문가 평을 들어보고 선임할 필요가 있다.”
상임지휘자 없이 운영되는 오케스트라도 있다. 베를린필과 더불어 세계 양대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빈필은 1933년 이후 상임지휘자를 두지 않고 객원지휘자로만 운영한다. 지휘자에 따라 오케스트라 색채를 바꾸는 대신, 단원 개개인이 음악의 주체가 되는 고유한 전통을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피에타리 잉키넨 케이비에스(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케이비에스교향악단 제공
케이비에스교향악단과 서울시향 상임지휘자는 핀란드 출신이다. 최근 핀란드 출신 상임지휘자가 잇따라 등용되면서 핀란드 지휘자 바람이 일고 있다. 이에 ‘핀란드 사단’을 일군 요르마 파눌라가 주목받고 있다. 파눌라는 1973년부터 21년 동안 시벨리우스 아카데미에서 ‘지휘자는 자신만의 개성을 가져야 한다’는 철학으로 지휘를 가르쳤다. 케이비에스교향악단 잉키넨과 서울시향 벤스케도 그의 제자다.
남철우 케이비에스교향악단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이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출신 상임지휘자들이 많았다. 최근 스펙트럼이 확대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핀란드다. 잉키넨 지휘자는 스승인 요르마 파눌라에게 ‘지휘자는 비행기를 운행하는 것과 같다. 비행기는 쉽게 추락하지 않는다. 지휘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실패를 두려워 말고 자유롭게 연주하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런 자유로운 음악적 전통에서 뛰어난 지휘자가 나오는 것 같다.”
마시모 자네티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경기필 제공
외국인과 한국인 지휘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한 지휘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외국계 지휘자들은 이해관계에 복잡하게 얽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관계에서 자유롭다. 때로 오케스트라를 장악하고 역량을 발휘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연주에 대한 신선한 자극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장점이 있다.” 한국은 젊은 지휘자를 안 키우는 토양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지휘자도 있다. “스승을 제치고 제자가 나서기 힘든 구조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끈 히딩크가 한국에 오기 전 한국 축구 토양과 비슷하다. 한국 음악계는 하이어라키(위계질서)가 강해, 이를 깨기 위해서는 외국인 지휘자가 자극제로 활동할 필요도 있다.”
최근 핀란드 지휘자가 각광받는 이유는 뭘까? 실력이 이유지만, 그런 차이를 만든 데는 핀란드 자연이 한몫했다고 한다. 류태형 클래식 평론가는 “북유럽은 겨울이 길고 별다른 엔터테인먼트가 없어서 음악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문화가 발전해왔다”며 “독일, 러시아와 인접해서 그 나라 음악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도 한 이유”라고 말한다.
안토니아 브리코는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메트로폴리탄오페라를 지휘한 첫 여성 지휘자였다. 그를 다룬 영화 <더 컨덕터>(2018)를 보면, 여성 지휘자들은 오랫동안 기회를 얻지 못하며 “여자가 지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되냐”라는 편견과 싸워야 했다. 17~18일 서울시향 객원지휘자로 포디움에 선 핀란드 출신 달리아 스타세브스카는 서울시향이 2010년 이후 11년 만에 초빙한 외국인 여성 지휘자였다. 17일 스타세브스카 공연을 관람한 류태형 평론가는 “서울시향 공연 중 오랜만에 좋았던 공연이었다. 스타세브스카가 파눌라의 제자답게 개성이 강한 공연을 보여줬다. 전체적 조망뿐만 아니라 순간순간 음악을 끌고 가는 지휘가 인상적이었다”고 극찬했다.
타니아 밀러 지휘자. 케이비에스(KBS)교향악단 제공
케이비에스교향악단도 2012년 재단법인 출범 뒤 처음으로 지난 5월 정기공연 지휘를 여성에게 맡겼다. 캐나다 빅토리아심포니 음악감독을 오랫동안 역임한 타니아 밀러였다. 당시 <한겨레>와 만난 밀러의 얘기다. “여자 지휘자는 북미와 유럽에도 많지 않다. 그만큼 지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기회가 좀 더 주어지고 있고, 리더십 강한 여성 지휘자도 늘고 있어 앞으로 더 많은 무대에서 여성 지휘자를 보게 될 것이다.”
한국인으로는 성시연이 서울시향 부지휘자와 경기필 상임지휘자를 지냈고, 여자경은 강남심포니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장한나는 노르웨이 트론헤임심포니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활약하고 있다. 김은선은 오는 8월 샌프란시스코오페라 음악감독으로 취임한다. 북미에서 여성이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상임지휘자)으로 취임하는 건 처음이다. 여성 지휘자의 바람은 앞으로 더 거세질 전망이다.
정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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