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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어릴 적 그 짠하고, 찐했던 추억 마주하기

등록 2021-07-03 10:47수정 2021-07-03 10:50

[토요판] 주일우의 뒹굴뒹굴 만화
⑭ 아이들은 즐겁다

여든이 훌쩍 넘은 노모께서 덕질을 시작하셨다. 빌보드 5주 연속 1위의 기염을 토하고 있는 방탄소년단(BTS)에 눈을 빼앗긴 것은 아니고 스웨덴 출신의 유시 비욜링이라는 가수에 흠뻑 빠지셨다. 얼마 전, 찾아뵈었더니 비욜링의 시디를 너무 많이 들어서 음반이 망가졌다고 하신다. 시디가 평평한 판에 레이저로 데이터를 새겨 놓은 것이라 읽기 위해서 빛이 수없이 부딪히면 닳기는 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그런 사실을 밝혀 노벨상을 탔으니까. 하지만 제작 회사들이 100년의 수명을 보장하던 시디가 그 정도 들었다고 쉽게 고장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플레이어를 들고 가서 시디의 고장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고장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수리는 어려워서 다른 것으로 바꾸어드렸다.

고장이 났다던 시디는 멀쩡했다. 그런데 여전히 똑같은 것을 하나 더 구해 오라고 하신다. 매일 반복해서 듣는데, 정말로 망가지면 어떻게 하냐고 하신다. 아인슈타인을 들먹이면서 그런 일은 정말 드물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넌지시 본심이 드러난다. 소장용으로 하나 더 가지고 싶다고. 그렇다면 흔쾌히. 검색을 해보니, 그 앨범은 품절이다. 심지어 전세계 사이트를 다 뒤져봐도 품절이고 중고도 없다. 비욜링의 다른 앨범을 권해보았지만 다른 것은 사절이다. 난감한 아들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고 노력이 부족함을 꾸짖으시니 도리가 없어 마음이 편치 않다. 만원짜리 민원도 해결하지 못하는 아들의 다음 숙제는 여러 나라 말로 녹음된 이 가수의 노랫말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 인터넷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작업을 겨우 마치고 출력해서 책을 만들었다. 그것이 끝나니, 비욜링의 개인사와 가족들 이야기가 궁금하시다고 한다. 부모, 부인, 형제들 사진도 출력해서 갖고 싶다고 하시네. 검색해보니 그의 전기를 담은 책들이 있어서 주문은 했는데 내용은 어떻게 전달할지 걱정이다.

엄마와 좋아하는 가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겁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와의 대화는 서로에 대한 걱정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성적, 결혼, 직장, 취업, 건강과 관련된 걱정들. 그런데 서로가 좋아하는 것으로 대화가 옮겨가니 짜증이나 상처가 되었던 시간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어린 시절, 엄마가 해주시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뜻, 희생, 사랑과 같은 가치들. 그런 이야기들이 내가 어떤 결정을 할 때, 늘 고민의 한 부분이었다. 세월이 지나 비욜링의 꿈, 좌절, 그리고 요절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나누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 들었던 이야기들과 시간을 뛰어넘어 연결된다.

<아이들은 즐겁다>를 읽으면서 주인공 다이에게 엄마의 부재가 얼마나 큰 상실이었을까를 계속 생각했다. 그 상실감은 만화영화 <토토로>의 영상이 그렇게 아름다운데도 크게 빈 구석을 느끼게 했던 감정이었는데 이 책에서 또다시 만났다.

엄마는 병원에 있고, 병원비와 생활비를 책임져야 하는 아빠는 일이 바빠 집에 있을 시간이 없다. 엄마와 아빠는 없지만 다이는 책을 읽고 친구들과 놀면서 채워가고 성장한다. 아직도 엄마와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내겐 다이의 일상에 큰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의 일상은 꽉 차 있다. 깡패에게 빼앗긴 돈을 다시 찾아주는 절친 민호도 있고 책을 함께 사러 가고 읽은 이야기를 나눌 아리도 있다. 인기가 많은 시아도 다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어른들의 시선은 훨씬 복잡하다. 친구 엄마들, 선생님들, 그리고 친척들은 다이의 처지와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다. 그 다른 생각들이 만든 그물에 언젠가는 걸리겠지만, 그래서 자유를 잃겠지만, 아직은 다이와 친구들은 그물코를 빠져나갈 만큼 작다.

아직도 엄마와 함께 덕질을 할 수 있는 내겐, 엄마를 잃은 다이가 안타깝지만 그것도 사정을 다 헤아릴 수 없는 내 생각일 뿐이겠지. 이 책은 제목도 <아이들은 즐겁다>이고 덤덤하게 일상을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시간과 그림이 감정과 사정을 흑백으로 만들어버린 탓이고, 실제로 일어난 일들은 훨씬 더 찐하고 짠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리고,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 감정들에 시달렸다.

만화애호가

※격주에 한번,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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