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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살아남는 일이 가장 큰 성공이니, 그 삶을 귀하게 여기시라

등록 2021-07-17 13:27수정 2021-08-03 16:23

[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
35. 죽고 싶은 마음

지켜줄 사람도, 지켜줄 몸도 없다니
내 삶은 왜 이토록 황폐함뿐인지
살아있는 존재 자체가 쓸모인데
쓸모와 능력 요구하는 사람들
이 사회에서 죽어간 성소수자들

왜 내게만 이런 짐이 지워졌는가
죽고 싶은 마음이 또 오면
내가 그놈의 멱살을 움켜쥐겠다

신랑과 나는 서로 어깨에 매달렸다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에게 생존은
더욱 귀할 것이니, 꼭 붙들고 계시라

가뜩이나 고단하고 고독한 것이 인간 삶인데, 힘겨운 일들이 사방에서 고지서처럼 날아드는 요즘이다. 죽어라, 죽어라, ‘그깟’ 생을 떠미는 것들 천지다. 그럴 땐 몸에 힘을 빼도 괜찮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가면 된다. 거지처럼 살아도 되고, ‘도움 좀 받읍시다!’ 대문 앞에 크게 써 붙여도 된다. 신랑과 유럽 여행 때 체코의 카를교 위에서 찍은 사진. 김비 제공
가뜩이나 고단하고 고독한 것이 인간 삶인데, 힘겨운 일들이 사방에서 고지서처럼 날아드는 요즘이다. 죽어라, 죽어라, ‘그깟’ 생을 떠미는 것들 천지다. 그럴 땐 몸에 힘을 빼도 괜찮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가면 된다. 거지처럼 살아도 되고, ‘도움 좀 받읍시다!’ 대문 앞에 크게 써 붙여도 된다. 신랑과 유럽 여행 때 체코의 카를교 위에서 찍은 사진. 김비 제공

살아서, 죽음을 적는 일은 불가능이다. 결국 살자는 이야기를 적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말자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죽음을 적어도 삶이고, 죽음을 적지 않아도 삶일 것이다. 아주 간단하고 한계가 분명한 글을, 그렇다면 나는 왜 오래도록 품고 있었을까? ‘죽고 싶다’와 ‘죽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라는 마음이 다르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지만, 오랜 시간 사로잡혔던 그 마음을 간단히 지워도 되는 건지 망설여진다. 이제 살아남기로 했으니 그 마음을 어리석거나 ‘몹쓸 짓’이라고 치부하고 돌아서면 되는 건가, 나는 아직도 그 문 앞을 서성거린다. 살아 있으니 삶이지, 아주 간단한데 멀리 가지 못한다.

너무 일찍 찾아온 고난들

죽고 싶다는 마음에 꼼짝없이 지배당했을 때, 나는 어린 나이였다. 어리다고 죽으려는 결심이 쉬울 리는 없는데, 너무 일찍 찾아온 고난들 때문에 나는 자주 겁에 질렸다. 살려달라고 말할 줄도 몰라 웅크리고만 있었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버릴 수 없는 삶을 가졌다는 게 너무도 버거웠다. 나를 지켜줄 사람도 없고 몸도 없다니, 내 삶은 왜 이토록 황폐함뿐이지? 지키기는커녕 온통 조롱이고 떠밀기만 하다니 내가 사는 세계는 왜 이토록 잔혹인 거지? 나는 어디로도 나아가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찾고 싶지 않았다.

꿈을 가지라고 어른들은 말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나에게 꿈을 가지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 꿈을 해체하라고 말했어야 했다. 너의 꿈은 여기에 없더라도 네 생의 어디에든 언젠가는 있고, 그 꿈은 다른 사람들의 것과 달라야 한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달라도 괜찮고, 다른 것이야말로 ‘정상’이라고 확신하는 어른이 있어야 했다. 그랬다면 최소한의 열정이나 열의가 샘솟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여기 이 세계의 공식은 너무도 간략했다. 이쪽이 아니라면 저쪽이거나, 성공이 아니라면 실패이거나. 수십억의 방식을 단 두가지로만 나누려는 시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한데, 그 속에 자신의 삶을 끼워 넣으려고 애쓰는 사람들뿐이었다. 끼워 넣지 못해 포기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부모가 있으면 넌 실패, 친구가 없으면 넌 실패, 한달 벌이가 그 정도라면 넌 실패, 그런 집에 살면 실패, 그런 몸이라면 실패. 모두가 성공을 바라고, 성공을 꿈꾸고, 성공이 곧 안정이라고 단언하는 의도는 알겠는데, 그렇다면 우리에겐 왜 그토록 많은 실패뿐일까? 수십억의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만큼 성공한 삶의 가짓수도 많은 게 당연한데, 왜 다들 스스로의 삶을 ‘실패’라고 단정 지은 채 실패한 인생을 사는 걸까? 한가지 실패가 모든 것의 실패로 이어지는 삶의 악순환을 만든 사람은 누구이며, 그런 톱니바퀴를 굴려 이익을 보는 사람은 또 누구일까?

잔뜩 웅크리고 살아야 했던 어린 나이에도 너무 많은 질문들이 떠올랐지만, 그 질문은 2021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듯 보인다. 어쩌면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마저 이제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입 닥치고 돈 벌 궁리나 해, 능력 없으면 빠지시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고 꿈을 도모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삶은 도박과 닮았겠지만, 돈을 위한 도박이 아니라 삶을 위한 도박 아닌가? 그런데도 우리는 삶이 아니라 돈 얘기만 한다. 명품 가방 하나 살 능력도 없는 게 무슨 삶을 논해, 정신 승리는 찌그러지시고. 누군가의 삶뿐 아니라 제 삶도 가볍게 깔고 앉는다.

죽고 싶은 마음이 들던 어린 내 삶은 지독했지만, 그때 나에겐 이 세계가 크고 넓을 거라는 기대감은 있었다. 내가 무엇이든 이 삶을 귀하게 여기면 내 것이 되는 시간이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요즘은 아무도 삶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모두가 해답을 찾고 있으면서, 그 해답을 논하는 언어들을 아주 가볍게 삭제한다. 다양한 질문을 쌓지도 않고 나누지도 않으며, 해답만 달라고 말한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마음조차 우린 왜 그렇게 일찍 허물고 마는 걸까? 우린 어쩌다가 죽음이 ‘해결’일 수 있다고 믿게 되어버린 걸까? 소중했던 것들을 삭제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그 잔혹을.

그 놈의 쓸모, 쓸모, 쓸모!

돌아보면, 남루한 그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 ‘혼자’라는 감각이 있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짐이 지워졌는가라는 고립감과, 그러니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자동적 확신은 참으로 지독하고 끈질겼다. 그래, 모르는 게 당연하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 툴툴 털고 일어나면 좋으련만, 고립의 감각은 끊임없이 머릿속에 유사한 불안을 쌓고 또 쌓는다. 삶이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인데, 마치 다른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남루한 생을 헤집고 또 헤집는다. 당연히 텅 비었을 공허를 확인한다.

텅 비었네, 공허하네. 또 그러고 말면 그뿐인데, 전에 없던 깨달음은 망치가 되어 온 몸을 내리친다. 그 놈의 쓸모, 쓸모, 쓸모! 이미 살아 있는 존재 자체로 충분한 쓸모인데, 제일 밑바닥에 깔려 있는, 지금이야 어차피 남루할 수밖에 없을 제 삶의 쓸모를 끄집어내 눈앞에 새빨갛게 적는다. 끝, 종료, 삭제, 포기.

불가능이구나 인정하고 나니 더 깊은 불가능이 되고, 속도가 붙은 불가능은 끝없이 굴러 내린다. 뭐 멋들어지게 사는 다른 사람들의 삶만큼은 불가능이더라도, 나한테만 가능한 게 있지 않겠어? 독불장군 같은 뻔뻔함이라도 충분히 쓸모 있을 텐데, 이미 결론지어버린 생의 공허는 들불처럼 번져 앞이 보이지 않는다. 뜨겁게 뛰는 심장은 삶의 증거인데, 쓸모의 증거인데, 시시각각 다가오는 유령의 발자국이라고 믿고 만다.

그 마음은 아침에 눈을 뜨면 물벼락처럼 쏟아졌다가, 하루 종일 마르지 않고 온몸 곳곳에 스며들어 일상을 짓누른다. 햇볕에 널거나 몸이라도 털어 말리고 싶지만, 그런 마음에 점령당한 누군가의 하늘엔 태양이 없고 땅 위엔 피가 도는 몸이 없다. 유령처럼 몸을 움직였다가 다시 잠자리에 들면 나란히 눕는 또 다른 유령이 있을 뿐이다. ‘어서, 죽어, 죽으면 끝나. 무의미하지? 화나지? 억울하지? 어서, 죽어, 죽으면 끝나.’

오직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속삭이는 그 유령의 말을, 나는 싫다고 두렵다고 하면서도 내 입으로 끝없이 되뇐다. 내가 유령이 되고 유령이 내가 되고 나면, 내 존재는 허공에 붕 뜬다. 오직 하나의 길을 향해 움직일 수 있는 몸이 된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니 이 글을 쓴다. 살아내고 있다. 살아내겠다는 다짐이 꽤 여러번 흔들리긴 했지만, 아직 유령의 속삭임에 놀아나지 않고 있다. 그 정체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는 그 마음에 관해 나는 여전히 확신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주름이 생기면 생길수록 그 유령의 목소리는 흐릿해진다는 것. 이따금 어깨너머에서 나타나고, 야채를 썰려고 들었던 칼끝 위에서 나타나고, 혐오자들의 글자들 속에서 나타나지만, 나는 속지 않았고, 현혹되지 않았고, 더 똑똑히 그 마음의 얼굴을 보려고 눈을 크게 뜬다.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그놈의 멱살을 내가 움켜쥔다. ‘내 죽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제 어디 한번 네가 말해봐. 너는 어디에서 와서 까부는데? 이제 네가 죽을 차례야.’

그 마음에 관해 가장 최근에 적어 넣은 단어는, 엉뚱하게도 ‘그리움’이었다. 죽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란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누구보다 잘 살아내고 싶고, 이겨내고 싶고, 지지 않고 싶은 그 맨 아래에, 죽고 싶은 마음이 추처럼 매달려 있던 건 아닌지. 그래서 더 온 힘을 다해 삶을 향한 그리움을 흔들고 나면, 정반대 쪽에서 더 큰 호를 그으며 신이 나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죽고 싶단 마음이 아니었는지.

죽고 싶은 마음을 한번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삶을 향한 지독한 그리움을 알까? 그리워하다 못해 애가 탔던 그 마음을 알까? 마음이 울렁거려 나는 다시 또 그 엉뚱한 단어를 적어 넣고, 자판을 물린다. 이번에도 해답은 찾지 못한 채, 생각의 바닷가만 이리저리 헤매다 되돌아온다.

안다, 알고 있다. 지난 30여년간 이 사회에서 죽어간 성소수자들의 이름을 낱낱이 나열하고, 책임을 묻고, 반성을 재촉하고 싶은 마음이 내 안에 있다. 내 사랑이 부정당하고, 존재가 부정당하고, 온통 조롱과 외면으로 떠밀린 그들의 죽음을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기에, 제일 큰 깃발을 들어 날마다 고함치고 싶은 분노가 있다. 그러나 오늘은 적지 않으려고 한다. ‘죽음’이란 그 이름만 적으려 한다. 삶을 말하기 위해, 죽고 싶던 그 마음을 기록한다. 이 사회가 누군가의 삶을 죽이고 끈질긴 외면으로 계속 벼랑 너머로 떠밀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나는 오늘만큼은 ‘죽음’만 적기로 한다. 살아 있으니 맞닥뜨리게 되는 그 마음을, 여자, 남자, 이쪽, 저쪽, 어디에 있더라도 상관없이 무너지고 마는 그 마음을, 적는다. 귀해지기를 바라는, 우리 삶을 적는다.

산문집 <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씨>에 실린 제주 해변 모습. 우울이 깊었던 신랑의 눈에 완전히 다르게 그려졌다. 그림 박조건형
산문집 <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씨>에 실린 제주 해변 모습. 우울이 깊었던 신랑의 눈에 완전히 다르게 그려졌다. 그림 박조건형

그 덕분에 나도 살아 있다

지독한 삶의 고립 속에 허우적거리다가 간신히 헤엄쳐 나왔을 때, 나처럼 죽음을 떠올리며 살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어디에든 존재하는 죽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애도를 위한 겸허일 뿐, 집착하고 매달렸던 그 모든 것들의 무용(無用)을 깨우치는 일이 곧 삶이구나, 죽음은 그토록 중요한 삶의 가르침을 전하려는지도 모르겠구나.

여러날 베란다에서 창을 열어놓고 나에게 유서를 썼다는 신랑의 고백을 들으면서, 나는 좀 많이 울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와 사는 동안은 죽지 말라고, 죽어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고서, 나는 더 많이 울었다.

그는 오랜 우울증 탓에 자살흔이 흉터로 남겨진 손목에 내 이름을 새겨 넣었고, 나에게 약속했다. 당신과의 그 약속은 꼭 지키겠다고, 죽고 싶은 마음이나 살고 싶은 마음 따위 모르겠고, 당신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생각만 가지고 살겠다고. 그것 하나만 보고 같이 살자고.

다행히 그는 지금 내 곁에 살아 있다. 덕분에 나도 그의 곁에 살아 있다. 죽고 싶어 했던 한 사람이, 죽고 싶었던 또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살아남았다. 머리카락이 하얘져 옛날이야기를 하는 서로를 꼭 기록하자고, 육십이 넘어 우리의 결혼식을 꼭 하자고 약속한다.

벽에 뭐 칠하는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며 늙어가자고, 그래도 뒤처리는 해주기로 하자고 너스레를 떨며, 우린 자주 큰 소리로 웃는다. 죽고 싶은 마음은 또 오겠지, 그러면 내가 그놈의 멱살을 움켜쥐겠다고 나는 어깨를 크게 부풀린다. ‘아이고 소도 때려잡을 든든한 우리 마누라!’, 신랑은 커다란 내 어깨에 매달린다. 매달린 건 그였지만, 나 역시 그에게 매달려 있다는 걸 안다. 이번 생은, 그거면 된다.

가뜩이나 고단하고 고독한 것이 인간 삶인데, 힘겨운 일들이 사방에서 고지서처럼 날아드는 요즘이다. 죽어라, 죽어라, ‘그깟’ 생을 떠미는 것들 천지다. 그럴 땐 몸에 힘을 빼도 괜찮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가면 된다. 거지처럼 살아도 되고, ‘도움 좀 받읍시다!’ 대문 앞에 크게 써 붙여도 된다. 어느 나라에서는 흰 깃발을 창문에 건다던데, 양말이라도 내다 걸어도 괜찮다. 살아남는 일이 가장 큰 성공이니,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손을 내밀 수 있는 귀한 몸이니, 모두가 당신의 생존을 기원하고 있다. 허튼소리가 아니다. 이토록 삶이 절실해진 세상이니, 가진 것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귀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지금 당신의 존재이니, 죽지 마시라. 그 삶을 귀하게 여겨주시기를.

▶ 김비.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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