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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다른 몸들이 같이 뛰어야 한다고 믿는다

등록 2021-08-14 16:09수정 2021-08-14 16:14

[한겨레S]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모두의 땀에 찬사를

성별과 상관없이 좋았던 농구
각각은 한 명의 평등한 존재

승리는 특정한 몸 위한 것 아냐 스포츠가 성별 넘어 뒤섞이기를
거실에서 도쿄올림픽을 보는 부부. 사진 김비 제공
거실에서 도쿄올림픽을 보는 부부. 사진 김비 제공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엉뚱하게도 씨름 모래판 위의 두 사람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역부감숏이었다. 그 작품은 트랜스젠더가 주인공인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영화였고 내가 시나리오 자문까지 했으니 트랜스젠더인 나에게 깊이 공명하는 장면이 여럿이었지만, 나는 이따금 두 사람이 카메라 위로 땀을 뚝뚝 떨구는 그 장면을 생각한다. 육체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 기댄 듯 움켜쥔 듯 서로의 몸을 그러쥐고 땀을 흘리는 두 사람. 잃어버린 자신의 삶을 되찾겠다고 씨름을 시작했던 주인공은 그 순간 모래판 위에서 어떤 성별이었을까? 그때 그에게 성별은 정말 중요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대부분의 스포츠 선수들이 그러하듯 오로지 한 가지 생각, 지지 않겠다는 마음, 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겠다는 마음, 그 하나뿐이었을까?

스포츠에 빠져든 몸

스포츠에 몰두해본 적 없는 나였다면 대답은 간단했을 것이다. 다른 성별로 느껴지는 누군가와 땀범벅인 맨몸을 부딪치며 경기하는 그 장면이 나는 비현실적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스포츠에 빠져드는 몸, 땀을 흘리며 오로지 한 가지 목표에만 집중하는 몸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다. 나는 모래판 위 동구가 그 순간 그 모든 성별을 뛰어넘은 존재였으리라 확신한다. 그래서 자신보다 훨씬 더 커다란 상대에게 몸이 들렸을 때, 버둥거리며 그를(그 몸을) 움켜쥐는 대신 두 팔을 놓고서 공중에 자신을 띄웠을 것이고. 사랑스러운 판타지였던 그 영화는 동구의 승리로 끝나지만, 나는 동구에게 그 승리가 없었더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이 펼쳐졌으리라 믿는다. 이미 그는 자신의 몸과 한계를 뛰어넘는 경험을 했으니, 아마 이후의 삶에서 더 먼 곳까지 가닿을 수 있었을 테니까. 성별이든 성별을 뛰어넘은 무엇이든 말이다.

농구 하는 김비 소설가. 사진 김비 제공
농구 하는 김비 소설가. 사진 김비 제공

십대 시절 다른 아이들처럼 남자가 되고 싶어서 농구를 시작했다고 여러번 고백했지만, 공을 들고 뛰며 땀을 흘리는 쾌감에 녹아드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론 한계를 마주하는 일이 먼저였다. 왜 나는 똑같은 두 손으로 공을 던지는데 한 손으로 가볍게 던지는 다른 사람들보다 멀리 가지 못할까 그게 답답했다. 두 팔과 두 손에 힘을 주고 아무리 멀리 공을 던져도, 가볍게 뛰어올라 한 팔로 공을 날리는 사람에 한참이나 모자랐다.

나중에야 공을 던지는 몸이 실은 두 팔이나 두 손이 아니라 온몸을 유기적으로 사용해야 가능한 것이었단 걸 알게 되었지만, 그때까지 나는 무수히도 많은 실패 앞에 좌절해야 했다. 기필코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한 팔로 공을 던질 수 있어야 남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내 믿음은, 아마도 성확정수술비를 벌겠다고 씨름에 뛰어든 동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더 높이 점프하고 더 커다란 몸을 가진 사람이 게임에 유리하단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몸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헬스클럽을 다니거나 전문 트레이닝을 받을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고 그걸 감당할 수 있는 가계도 아니었으니, 나는 아침마다 무거운 것들을 들어 올리거나 팔굽혀펴기를 하며 몸집 키우기에 몰두했다. 까치발을 들고서 달동네를 뛰어오르며 종아리 근육도 키웠다. 정말 내 점프는 더 높아졌고, 바스켓 아래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몸의 반경은 넓어졌다. 날마다 손목을 비틀고 무릎 운동을 하며, 나도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무거운 농구공을 한 손 위에 올리고 더 멀리 날릴 수 있었다. 나는 기꺼이 모든 시간을 할애해 운동에만 집중했다. 커지는 몸이 신기하고 또 두렵기도 했지만, 남자가 되면 익숙해지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운동은 운동이었고 성별은 성별이었단 걸 지금이야 어렵지 않게 깨닫지만, 남성과 여성을 하나의 이미지로만 환기하던 당시에는 나 역시 세상의 이분법에 갇힌 인간이었다.

나는 농구가 참 좋았다. 내 성별과는 상관없이 좋았다. 너무 심하게 운동을 해 무릎 수술을 하고서도, 무릎 보조기를 한쪽 다리에 친친 감은 채 나는 농구공을 들고 운동장에 나갔다. 인생이란 게임에 단 하나의 역할도 제대로 부여받지 못한 삶이어서 그랬을까? 다섯 사람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팀의 일원으로 마음껏 뛸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좋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 공을 찔러 넣어 내가 던진 패스로 우리 팀원이 골을 성공시켰을 때, 나를 향해 고마움을 표시하며 팔을 번쩍 들었을 때, 손바닥을 마주 부딪쳤을 때, 나는 비로소 한 사람의 평등한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나의 성별과는 상관없이 한 사람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 간절히 승리를 바라고 같은 꿈을 향해 땀을 흘린다는 것, 그럴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나는 온몸이 저릿저릿하도록 행복했다. 때로 우리의 경기는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고, 패배했으며, 경기가 끝난 뒤 땀범벅이 되어 벌게진 얼굴을 말없이 쳐다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또 한자리에 모여 같은 목표를 생각했다. 내가 내 몫을 하겠으니 너도 너의 몫을 해주리란 서로를 향한 믿음이 없다면, 승리를 향해 나아갈 수 없었다. 승리가 아닌 멋진 패배조차 움켜쥘 수 없었다. 나의 성별이 무엇이든 우린 같이 뛰었고, 같은 땀을 흘렸으며, 그것만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기쁨이었다. 그 기쁨이야말로 참으로 공정했다.

땀에는 성별이 없다

이따금 운동장에서, 화면 속에서 공을 쫓아 땀을 흘리며 맹렬히 부딪치는 사람들을 본다. 땀에는 성별이 없고 그 승리나 패배 역시 특정한 몸을 위한 것일 리 없지만, 우리의 게임은 여전히 둘로 나뉘고 그 몸의 모양으로 자격을 부여한다. 다수의 입장에서만 작동되는 공정함은 정말 공정한 건지, 그동안 빼앗겼던 우리들의 스포츠를 위해선 왜 아무 말이 없는지. 나는 우리의 스포츠가 성별을 넘어 뒤섞이고, 다른 몸들이 같이 뛰어야 한다고 믿는다. 즐거움은 모두에게 가닿아야 하는 것이니, 그것이야말로 ‘스포츠’의 참된 실현 아닐까?

그럼에도 이 엄혹한 시기에 땀을 흘렸던 모든 선수들을 위해 나 역시 목소리를 높여 응원했다. 그 땀을 알기에, 우리 같이 뛰는 같은 팀이라고 믿기에 같이 소리쳤고 같이 울었다. 꽤 오래 잃어버렸던 환호와 뜨거움을 알게 해주어 너무도 고마웠다. 수고 많으셨다.

그림 박조건형
그림 박조건형

김비. 소설가.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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