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디즈니 팬들의 축제인 ‘디(D)23 엑스포’에서 디즈니플러스(+) 로고와 함께 오리지널 콘텐츠, 서비스 개시일 등이 처음 공개됐다. EPA 연합뉴스
국내 스트리밍 서비스(OTT) 시장의 경쟁이 전에 없이 치열했던 한 해였다. 연간 한국에서 벌어들이는 구독료 수입이 한국방송공사(KBS) 수신료 수입을 뛰어넘을 만큼 크게 성장한 ‘넷플릭스’와, 이에 맞선 국내 스트리밍 서비스 ‘티빙’과 ‘웨이브’, ‘왓챠’ 등의 경쟁이 뜨거웠다. 티빙과 웨이브 모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여고추리반>, <환승연애>, <유 레이즈 미 업>, <검은 태양> 무삭제판 등 수십개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선보였다. 한국에서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지만 그 존재감은 미미했던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또한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3.0+1.01>의 독점 공개를 통해 국내 시청자들과 낯을 익혔고, 아마존의 모델을 착실하게 따라가고 있는 쿠팡 또한 ‘쿠팡 플레이’를 론칭하며 첫 오리지널 콘텐츠로 예능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코리아>를 선보였다. ‘애플티브이 플러스’ 또한 지난 11월5일 첫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 <닥터 브레인> 공개와 함께 국내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치열한 경쟁의 한가운데, 마침내 ‘디즈니플러스’가 한국에 상륙했다. 스트리밍 서비스계의 거인 넷플릭스와 호각지세의 싸움을 펼칠 만한 유일한 맞수라 손꼽히는 디즈니플러스가 11월12일 국내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수많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팬들부터 아이들에게 안심하고 보여줄 수 있을 만한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기다렸던 이들, 한국에는 그 수가 적지만 충성도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스타워즈> 시리즈 팬들까지, 한국에도 디즈니플러스의 상륙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다. 한국 상륙 전부터 이미 태평양 너머에서부터 <만달로리안>, <완다비전>, <팔콘과 윈터 솔져>, <로키> 등의 오리지널 시리즈들에 대한 압도적인 호평이 들려왔으니까 말이다.
좋은 일일까? 단언은 어렵다. 물론 티브이 시청자 입장에서는 보고 즐길 것들이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다. 스트리밍 서비스의 등장은 기존의 지상파나 종합편성채널, 케이블티브이에서는 제작해서 방영하기 어려웠을 만한 <킹덤>이나 <디.피.>(D.P.), <오징어 게임> 같은 콘텐츠들을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나쁜 일만은 아니다. 각각의 스트리밍 서비스들은 경쟁적으로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에 나서고 있고, 그 덕에 산업 종사자들은 더 많은 기회를 얻는다. 콘텐츠 제작을 위해 제한된 수의 방송사들과 접촉하던 제작사들은, 이제 수많은 스트리밍 서비스들과도 접촉할 수 있다. 작품이 실제로 제작되어 시청자들과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증가하고, 고용 창출도 그만큼 늘어난다.
그러나 ‘유료 서비스’의 증가는 자칫 미디어 소비에서도 유의미한 계층 간 불평등을 낳을 확률이 높다. 우리가 흔히 티브이를 가장 대중적인 미디어라고 여겨왔던 것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신료 납부만으로 모두가 같은 양의 정보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월 2500원의 한국방송공사 수신료만 납부하면, 우리는 한국방송공사의 2개 채널과 문화방송(MBC), 에스비에스(SBS), 교육방송(EBS)의 다섯개 채널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케이블티브이가 등장했고, 아이피티브이(IPTV)와 위성방송, 종합편성채널 등이 등장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케이블티브이나 아이피티브이, 위성방송 등에서 제공하는 채널들은 대체로 대동소이했고, 개중 하나만 구독하면 당대 화제가 되는 콘텐츠를 접하는 데 큰 부담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인들은 <오징어 게임>을 보기 위해 넷플릭스를, <환승연애>를 보기 위해 티빙을, <유 레이즈 미 업>을 보기 위해 웨이브를, <완다비전>을 보기 위해 디즈니플러스를 구독하기 시작했다. 각각의 서비스 월 구독료는 큰돈이 아닐지 몰라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화제작을 다 챙겨 보려면 월 지출액은 훌쩍 증가한다. 하나의 아이디로 여러 명이 함께 사용할 수 있다는 걸 고려하더라도, 각자의 경제 사정에 따라 미디어 접근 경험에 차등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 특히나 또래 집단과 같은 경험을 공유하느냐 아니냐로 차별이나 따돌림이 일어나기 쉬운 청소년기 미디어 소비자들에게는, 자칫 타인의 아이디를 빌려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만으로 놀림감이 될 위험이 상존한다.
산업 종사자들에게도 위험은 존재한다. <오징어 게임>의 사례에서처럼 작품이 크게 흥행한다고 해도 그 수익을 공정하게 배분받기 어렵다는 위험도 존재하지만, 스트리밍 서비스용 콘텐츠 제작 현장은 아예 새로운 노동환경이라는 점 또한 큰 위험이다. 그동안 영화 노동자들과 티브이 노동자들은 각각의 제작 현장에서 표준근로계약과 안전수칙 등을 보장받기 위해 각 산업의 자본들을 상대로 끈질긴 투쟁과 교섭을 반복해 왔다. 그러나 스트리밍 서비스는 아예 새로운 시장, 새로운 자본이다. 새로운 시장이 열리면 초창기에는 규제가 적을 수밖에 없고, 그런 시장에서는 자본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영화 노동자들이 영화자본과 맺어왔던 표준근로계약이나, 티브이 노동자들이 각 방송사들에 요구하고 있는 합의들이 적용되기 어려운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선 최근 스트리밍 서비스 과잉 경쟁으로 인해 제작사들 사이에 “차라리 과징금을 내고 콘텐츠를 빨리 선보이는 게 낫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지자, 이에 맞서기 위해 지난 10월 국제극장무대종사자연맹(IATSE)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산업 내 노동자들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당하고 있는 셈이다.
새롭고 흥미로운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는 앞에서 ‘콘텐츠 소비 계층 간 불평등’이니 ‘산업 종사자들의 안전’이니 우려부터 말하는 건 재미도 없고 인기도 없을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새로운 즐거움에 수반될 위험을 일찍부터 염려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위험을 몸으로 느끼게 됐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디즈니플러스의 상륙으로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고, 워너브러더스사의 ‘에이치비오맥스’ 등 더 많은 스트리밍 서비스의 국내 진출 또한 예정되어 있다. 시장이 더 걷잡을 수 없어지기 전에, 지금 시장의 룰을 다시 살펴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이승한 _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