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 출연한 연예인의 ‘유모차’ 표현이 ‘유아차’로 표기되자, ‘유아차’를 순화어로 권장한 국립국어원 누리집에는 이에 항의하는 글이 쇄도했다. 국립국어원 누리집 갈무리
파란만장한 한 주였다. 지난 3일, 안테나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뜬뜬’은 유재석이 진행하는 토크쇼 ‘미니 핑계고’의 새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홍보하러 나온 배우 박보영과의 대화로 이루어진 이날 방송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건, 엉뚱하게도 ‘유아차’라는 단어였다.
박보영은 의외로 조카들과 집 밖으로 나가도 사람들이 자신을 잘 못 알아본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노하우를 공개했다. “제가 이제 좀 약간 노하우도 생기긴 하는데, 제가 (조카들 유아차를) 밀면 (제 얼굴을) 잘 안 봐요. 다 아기를 보지, ‘아기 엄마’까지는 (시선이) 잘 안 올라가더라고요.” 호스트 유재석과 게스트 박보영, 이날 녹화에 함께 참여한 조세호 모두 익숙한 입말인 ‘유모차’라는 단어를 썼지만, 방송 자막은 전부 ‘유아차’로 표기됐다. 그러자 남초 커뮤니티에선 분기탱천한 이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다. “페미다! 페미가 나타났다!”
‘유아차’로 표기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2018년 서울시 성평등 언어사전 캠페인을 통해 “‘유모차’라는 단어는 양육의 주체를 엄마로만 규정하고 있으니 ‘유아차’라는 단어로 대체하자”는 시민 의견이 접수되었고, 그 이후로 각종 방송과 언론은 ‘유모차’라는 단어를 ‘유아차’로 순화해서 사용하고 있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유모차’라는 단어 자체가 과거 유모라는 직업이 존재하던 시절에 등장한 단어라서 현 시대상을 담아내기 어렵기도 하고. 국립국어원 또한 ‘유아차’의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아예 없는 말을 억지로 새로 만든 것도 아니다. 1957년 한글학회가 간행한 ‘조선말 큰사전’ 표제어에도 ‘유아차’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고, 1999년 국립국어원이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 초판본에도 실려 있었으니까. 기존에 존재했으나 상대적으로 그 쓰임이 많지 않았던 단어를 다시 조명해 더 중하게 쓰기로 한 것뿐이다. 오랜 세월 사용해온 ‘유모차’라는 단어에 비해 그 쓰임이 적긴 하지만, 2018년 이후 ‘유아차’라는 단어는 각종 대중교통, 공공시설에서 익숙하게 쓰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제작진 중에 페미니스트가 있다!”고 열을 올리던 일부 남성 네티즌들은, ‘유아차’가 국립국어원이 권장하는 순화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제 화살을 국립국어원에 돌린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기관이 앞장서서 성별 갈등을 조장한다”라거나, “국립국어원에도 페미니스트가 있는 거 아니냐”라거나, “세금이 아까우니 해체하라” 같은 주장들이 온라인 곳곳에 등장했다. 국립국어원 누리집 ‘온라인 가나다’ 게시판에도 관련 질문을 쏟아내는 남성 네티즌들의 글이 줄을 이었다. 사용한 닉네임들도 참 하나같이 주옥같다. ‘페미정병’, ‘페미멸공’, ‘페미펀치’….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다. 열을 올리는 사람들은 “‘유아차’는 여성단체가 주장한 단어이고, 많이 쓰이지도 않는 단어를 억지로 쓰게 강제하는 건 성별 갈등을 조장한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유모차’라는 단어야말로 남성과 여성 모두를 차별하는 단어다. 어미 모(母)라는 글자의 존재는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대디나 육아를 주체적으로 담당하는 남성들을 배제시킨다.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정말로 ‘남성의 권익’을 생각한다면, 동료 남성들의 주체성을 해쳐가면서까지 ‘유모차’라는 단어를 지켜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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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인 5일에는,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토크쇼 ‘피식쇼’ 새 에피소드가 공개됐다. 가수 제시가 출연해 자신의 근황과 신곡 ‘검’을 홍보하고 간 이날 방송에서 제시는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결혼해서 아기 낳고 싶어.” “그래서 담배를 끊었다며?” “맞아. 담배도 끊고, 그리고 술도 안 마시고.” 하루에 두 갑씩 담배를 태웠다던 제시는 이제 담배 냄새도 못 맡는다며 독하게 담배를 끊어낸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른 주제로 한 바퀴 대화가 돈 다음, 주제는 다시 임신 이야기로 돌아왔다. “나 지금 34살이란 말이야. 내년에라도 당장 아이를 갖고 싶어. 누굴 좀 만났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그렇게 못하면 난자를 얼려서…. 한국에서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고 싶은데 남편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왜 안 되는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시 특유의 솔직한 화법과 단번에 담배를 끊어낸 실행력에 박수를 보내는 동안, 온라인 한구석에서는 그의 말을 고깝게 보는 사람들이 모여 음침하게 댓글을 달았다. 에스비에스(SBS) 뉴스의 페이스북 계정에 이날 방송 소식이 올라오자, 남성 네티즌들은 그 밑에 이런 악플들을 달았다. “아이는 무슨 죄가 있어서 니코틴을 기본으로 받고 태어나야 하나? 놀 거 할 거 다 하고, 시간 돼서 아이 가지고 싶고 뭐 그런 건가?”라며 담배를 태웠던 제시의 평소 행실을 비난하는 댓글, “88년생인데 지금 낳아도 노산”이라며 나이를 문제 삼는 댓글, 괜찮은 남자를 못 만나면 정자기증을 받아서라도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제시의 말에 “비정상적인 과정으로 태어난다면 아이에겐 너무나 큰 트라우마가 될 것” 따위의 말로 ‘정상가정’의 형성을 강요하는 댓글…. 아니, 저출생 인구절벽 시대에 아이를 낳고 싶어서 그 끊기 어려운 담배까지 끊은 사람이 있으면 환영해야 할 일 아닌가? 다들 제정신인가?
난 한주 사이에 일어난 이 두가지 일이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유아차’라는 단어 하나를 못 견뎌서 국립국어원 누리집을 도배해가며 육아를 여성만의 일로 고착화하려 들고,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여성에게 “평소에 담배를 태웠던 사람이 왜 아이를 가지려 하느냐”, “30대 중반이면 노산이다”, “아비 없는 자식을 키우겠다는 거냐” 따위의 말들을 던지며 그 소망을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이다. 2023년 서울시 합계출산율이 0.53명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세상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이 모양인데 대체 누가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싶겠는가?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