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최연소 대변인 신원희(이채은)가 뛰어난 업무 역량을 뽐내지만, 여성이란 이유로 성취에 의심을 받는다. 웨이브 유튜브 채널 갈무리
“전 신원희 대변인이 참 좋더라고요. 자기 일 똑 부러지게 잘하는.” “그렇죠?”
스트리밍 서비스 웨이브가 선보인 본격 정치풍자 코미디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를 보고 난 뒤 동료 평론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우리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캐릭터는 역시 ‘문화체육관광부 최연소 대변인’으로 설정된 조연 캐릭터 신원희였다. 이채은 배우가 연기한 이 ‘늘공’(직업공무원을 뜻하는 신조어)은, 뼛속까지 정치적 계산 대신 현장과 업무를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이다. 전임 문체부 장관 민철우(김인우)가 불미스러운 대형 사고를 치고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도, 원희는 당황하는 일 없이 리스크 관리 작업에 들어간다. 연설문이나 기자회견문이 필요할 때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늘 시나리오별로 3가지 버전의 대본을 준비해두는 모습은 또 얼마나 믿음직한지.
그러나 이렇게 일을 잘하는 원희조차, 자신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진 못한다. 자신을 무시하며 제멋대로 일을 벌이던 기획재정부 출신 엘리트 관료 서도원(양현민) 정책보좌관을 직위해제하는 신임 이정은(김성령) 장관의 파격 행보를 목격한 직후, 기획조정실장 최수종(정승길)은 같이 점심을 먹다 말고 원희에게 말한다. “그나저나 서도원 라인들 나라 잃은 표정이던데, 자기도 좀 난처하겠다.” “저요? 제가 왜요?” “아… 그래도 도원이가 원희씨 최연소 대변인 만들어준 건데….” 원희처럼 어린 여자가 문체부 최연소 대변인이 된 건 분명 더 유력한 누군가의 힘이 작용한 결과일 거라는 시선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원희의 면전에다 대놓고 한 수종이 극중에서 악역인 것도 아니다. 20여년간 문체부에서 공직 생활을 하면서 나름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한 수종 같은 평범한 관료조차도, 여전히 어린 여자가 자기 능력만으로 이렇게 빠르게 올라올 수는 없지 않겠냐는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수종의 말에 원희는 수종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무심하지만 냉소적인 말투로 답한다. “아, 그렇구나, 나만 몰랐나? 고마웠다고 전화 한 통 해야겠네.” 자신은 승진을 위해 누구의 라인을 탄 적도 없고, 온전히 제 실력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통해 이 자리에 올라온 건데, 다들 나 없는 곳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는 메시지는 수종의 말문을 틀어막는다. 민망해진 수종은 다시 타깃을 장관의 말단 수행비서인 김수진(이학주)으로 돌린다. 보좌관 대행 됐다고 벌써 걸음걸이부터 달라졌다고. 장관의 정적이었던 차정원(배해선) 밑에 있다가 싹 장관 밑으로 와서 일하는 것만 봐도 저 친구 야심가라고. 자꾸 직장 동료들의 인사 이동을 두고 이런저런 가설을 내세우며 흉을 보는 수종의 말을, 원희는 단호하게 끊어낸다. “실장님, 그만하시고 해물냉채 드세요. 국회 경력도 풍부하고, 예술경영 석사고, 수진씨 알아서 잘하겠죠, 뭐.” 원희는 정부 부처의 인사 이동에 지나치게 정치적 해석을 붙이고 고정관념을 동원해가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시간이 있으면 내게 주어진 일부터 충실하게 해내자고 잘라 말하는 당당한 사람이다.
작품의 핵심 줄거리가 되는 장관 남편 납치사건을 다루는 태도 또한 원희의 합리성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자신의 개인사 때문에 문체부가 추진하는 중대한 사업들에 차질이 갈 것을 염려한 장관은, 납치범들의 요구대로 사임할 것을 고려한다. 반면 이정은 장관 한명만 믿고 자신의 모든 정치적 야심을 건 수행비서 김수진은, 장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말하는 원희의 말에 흥분해 “서도원이 이렇게 하라고 시키더냐, 대변인님 경력에 누가 될 거 싫어서 장관님 등 떠미는 거 아니냐”고 분노한다. 원희는 장관과 수진 두 사람 모두를 진정시키며, 납치범이 왜 돈 대신 장관의 사임을 요구하는지 집중하자고 제안한다. 자신의 능력과 객관성을 모두 의심당했던 원희는, 나중에 수진의 사과를 받고는 그를 용서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공(정무적 이유로 임명된 공무원)이 늘공 마음 의심할 수 있죠. 우리 더 늠름해집시다.” 다른 이들이 자꾸 본질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꺼낼 때, 각종 핑계를 대면서 다른 사람들의 탓을 하려 들 때, 오로지 제 일에 충실하게 달려온 원희는 말한다. 그러지 말자고. 품위와 본질을 잃지 말자고. 더, 늠름해지자고.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한 장면 웨이브 유튜브 채널 갈무리
실제로 일하는 여성들은 업무 성과에 비해 불필요하게 잦은 비아냥과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한다. 최근 인천의 한 여자 순경이 흉기난동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을 두고 현장을 이탈했다는 뉴스가 전해지며, 온라인상에는 ‘여경 제도 폐지하라’는 비난이 들불처럼 번졌다. 그러나 해당 순경이 정식 경찰공무원으로 임용되기 전인, 아직 물리력 대응훈련도 한번 받지 못한 시보 신분이었다는 점은 나중에 밝혀졌다. 함께 출동했던 경력 19년차의 남자 경위 또한 여자 순경과 함께 현장을 이탈했다는 점 또한 나중에 밝혀졌는데, 여자 순경의 현장 이탈을 비판하며 ‘여경 제도 폐지’를 외치던 이들이 남자 경위도 함께 비판했다는 이야기는, 내가 과문한 탓인지 들어본 적이 없다. 한국 사회는 아직 남성의 업무 중 과실은 개인의 과실이지만 여성의 업무 중 과실은 여성 전체의 문제인 것처럼 치부되는 고정관념이 만연한 것이다.
여성의 성취는 특혜의 결과이고 업무 중 과실은 여성 전체의 문제인 것처럼 여겨지는 환경 속에서, 신원희 같은 캐릭터의 존재는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창구가 된다. 온갖 오해와 억측에 정면으로 맞서며 자신의 맡은 바를 늠름하게 해내는 여성, 일은 제발 일로 평가하자고 말하는 여성. 어쩌면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는 훌륭한 정치풍자 코미디인 만큼이나, 한국 사회 곳곳에서 제 일을 충실하게 해내려 노력하는 수많은 신원희들에게 보내는 헌사 또한 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승한_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