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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잘 만든 예능’이 우리를 춤추게 하리라

등록 2021-12-25 10:19수정 2021-12-25 15:10

[한겨레S]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스우파와 골때녀가 바꾼 것
더 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설 용기를 내도록 레거시 미디어들이 방송 프로그램으로 구실을 하고 있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한 장면. 유튜브 화면 갈무리
더 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설 용기를 내도록 레거시 미디어들이 방송 프로그램으로 구실을 하고 있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한 장면. 유튜브 화면 갈무리

“어, 이건 뭐예요? 축구화 사셨네?”

일을 논의하러 방문한 여자 동료의 집 현관에는 새로 산 축구화와 축구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동료가 말했다. “아니, <골 때리는 그녀들> 보다가 나도 공이 너무 차고 싶어서요.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아는 언니가 여자들끼리 축구 하는 모임이 있다고 날 데려가더라고. 그래서 그날 처음으로 볼을 차봤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좋아서, 더 잘 차보고 싶어서 축구화도 사고 축구공도 샀지.” 축구의 매력에 빠지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는 환하게 웃었다. 듣던 나도 씨익 하고 웃었다. 광고 카피처럼, 머릿속에 ‘야, 너두?’라는 문장이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내게 에스비에스 <골 때리는 그녀들>(2021~) 보다가 축구를 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한 여자는 이 동료 한 사람이 아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모여서 공을 차기 시작했다는 젊은 엄마들, 동네에는 아직 축구를 하는 여자들을 많이 찾지 못해서 주말마다 옆 동네로 원정을 간다는 이웃…. 맛보기(파일럿) 방송을 선보인 게 아직 1년도 채 안 됐는데 <골 때리는 그녀들>이 남긴 파장은 이렇게 크다. 잘 만든 스포츠 예능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화면을 보며 환호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도 해보고 싶다”며 운동 장비를 사게 만드는 스포츠 예능은 그리 흔치 않다.

“나도 축구공 한번 차보고 싶다”
골때녀 보다가 축구화 산 동료

“저거다” 시청자 삶 변화 이끌어

김혼비 작가의 에세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2018)가 출간된 이후, 내 주변엔 축구를 배우고 경기에 나서고 싶어 하는 젊은 여성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러나 축구는 팀 스포츠다. 나 혼자서 축구를 하고 싶다고 해서 경기에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서 풋살이 가능한 인원수를 모았다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우리 팀과 맞붙을 팀을 찾아야 하지 않나. 그런데 <골 때리는 그녀들> 이후로는 여기저기서 조금씩 아마추어 팀을 꾸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들이 들린다. “나도 공을 차보고 싶다”는 마음을 낸 여자들이, 팀을 이루고 여자 축구팀끼리 경기를 잡을 수 있을 만큼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비슷한 변화는 엠넷 <스트릿 우먼 파이터>(2021) 이후에도 드러났다. 주변에서 방송 댄스, 아이돌 댄스를 배우는 여자들은 그 이전에도 많았다. 하지만 격렬한 크럼핑이나 브레이크댄스를 배우겠다고 나서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와이지엑스(YGX) 소속의 비걸(B-girl) 예리가 보여주는 브레이크댄스를 보고 한눈에 “저거다!” 하고 반했다는 이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내심 더 강하고 절도 있는 동작들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여자가 저렇게 격렬한 춤을 추는 건 안 어울린다” 정도에 머물러 있으면 선뜻 앞장서서 마음을 내기가 어렵다. 그런데 누군가 앞장서서 그 편견을 멋지게 깨부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 뒤로 자연스레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두 편의 예능이 단순한 감탄을 넘어 “나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건 “못하는데 괜히 욕심낸다고 타박을 들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을 함께 날려 버리기 때문이다. 파일럿 방송을 다시 보면,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축구 같은 축구를 하는 멤버는 많지 않다. 골키퍼들은 공을 쥔 채 골라인 밖으로 나오는 실수로 페널티킥을 허용하기 일쑤고, 공격수들은 결정적인 찬스를 잡아도 공을 제대로 차지 못해 득점에 실패한다. 그랬던 이들이, 이제는 상대 팀의 호흡을 빼앗는 빠른 세트피스 득점과 집요한 밀착 대인수비, 호쾌한 감아차기로 경기를 지배한다. <골 때리는 그녀들>의 첫출발을 목격한 이들이라면, 지금 저렇게 멋진 이들도 처음엔 지금의 나와 실력이 비슷해서 온통 ‘구멍’이고 ‘허당’이라는 소리를 듣던 시절을 보냈음을 알게 된다. 나라고 시작하지 못하리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미 완성형으로 날고 기는 댄서들이 경합하는 자리지만, 그 안에서도 실력 차이로 ‘먼저 떨어트리기 쉬운 약자’로 지목당하는 멤버가 있고, 그런 멤버가 주변의 시선과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서사가 한 축을 이룬다. 멋지게 완성된 무대만 보았을 때에는 알 수 없었을 치열한 과정과 고충들 덕분에,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실수할까 두려워 첫발을 못 떼는 사람들마저도 설득할 수 있었다. 자기 일을 저렇게 잘하는 사람도 그 나름의 어려움을 겪는데,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은 당연한 것 아닌가?

어쩌면 이런 게 방송이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순기능인지 모른다. 한국 사회에는 축구를 하고 싶었던 여자도, 격렬한 춤을 추고 싶었던 여자도 이미 곳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마치 ‘여자라서’ 그런 건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한 사회적 인식이, ‘못하는데 괜히 나댄다’는 타박을 들을까 하는 두려움이, 이미 존재하는 욕망을 실제로 반영하는 일을 가로막고 있었을 뿐이다. 2021년 <골 때리는 그녀들>과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여자라서’ 안 될 것은 없다고, 이미 그걸 욕망하고 실천하고 있는 이들이 이렇게 있다고 보여줌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설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내 주변의 여자들은 퇴근 뒤 축구화의 끈을 바짝 조이고, 휴일에 댄스 스튜디오에서 구슬땀을 흘린다. 실패나 타박을 두려워하는 대신, 넘어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는 법을 익히면서.

&lt;골 때리는 그녀들&gt; 한 장면. 유튜브 화면 갈무리
<골 때리는 그녀들> 한 장면. 유튜브 화면 갈무리

‘스우파’ 시청자도 콘텐츠에 환호
어쩌면 방송 최대 순기능일 수도

여성, 장애인, 소수자 누구나 ‘당연히’ 된다

‘○○라서 안 된다’는 고정관념의 벽을 뛰어넘으니 이처럼 광활한 가능성이 열렸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여자’ 말고도 대입해 볼 수 있는 단어들이 더 많이 남아 있지 않을까? 아직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로 가로막혀 있는 분야도 많이 남아 있거니와, ‘청소년이라서 안 된다’, ‘장애인이라서 안 된다’, ‘성적 소수자라서 안 된다’ 등으로 차단당한 기회들까지 셈하면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진다. 티브이 노동자들이 더 부지런히 살펴보고 용기 있게 결단한다면, 2022년에는 이미 존재하지만 편견에 가로막혀 가시화되지 않은 욕망들을 더 많이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2022년도 훨씬 더 풍성해질지 모른다. 어느새 ‘레거시 미디어’가 된 티브이가, 다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첨병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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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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