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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죽은 이들 진실은…그를 향한 산 사람의 사랑에 남아”

등록 2022-01-30 17:11수정 2022-01-30 17:28

[한겨레S] 살롱 드 여울
<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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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승원 작가
사진/이승원 작가

아름다운 덕담 속에 뜻밖의 공격성이 깃들어 있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 ‘부자 되세요’라는 말. 이런 말들에는 꽃길 아닌 길, 부자 아닌 삶에 대한 외면과 부정이 깃들어 있다. 이토록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꽃길만 잽싸게 골라 사뿐히 걸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겠는가. 때로는 덕담조차 부담으로 다가오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꽃길만 골라 걷는 삶이 좋은 것이 아니라, 지금 당신이 걷는 바로 이 길이 꽃길이라고. 어쩌면 우리 걷는 모든 길이 꽃길이라고. 홀로 남겨진 채 죽어간 이들의 집을 청소하는 험난한 길을 가면서도, 그는 자신이 걷는 길이 바로 꽃길임을 안다. 그는 길이 시작되기 전에 꽃길인지 흙길인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길이든 거부하지 않고 일단 온몸으로 부딪쳐, 모든 길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독사나 사고사 현장, 또는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집들을 말끔히 청소하는 특수청소 서비스회사 ‘하드웍스’를 운영하는 김완 작가. 그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죽은 자의 집 청소>(김영사, 2020)를 출간하여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유령작가’로 오랫동안 활동한 그는 최초로 실명을 쓴 작품 <죽은 자의 집 청소>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지만, 방영 때마다 장안의 화제를 뿌리는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비롯한 모든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 요청을 정중히 거절한다. 김완 작가는 얼굴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다. 자신이 주목받기보다는 고통받는 이웃의 삶과 죽음이 주목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진/이승원 작가
사진/이승원 작가

죽은 자의 마지막 흔적, 외로움

―김완 작가님, <죽은 자의 집 청소> 이후 계속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실 텐데요. 독자들의 반응도 참 각양각색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고생한다고 음식을 보내주시는 분도 있고,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힘든 삶을 살고 계신 분들이 연락을 많이 주셨어요. 통장 잔고는 점점 바닥을 보이고 의지처는 반려동물 하나뿐인데 마음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는 분도 있고, 힘들었던 과거를 모두 정리하고 결혼을 했는데도 자꾸만 과거의 기억이 발목을 잡아 괴롭다는 분도 있지요. 삶이 너무 힘들다는 중학생의 연락을 받고 깜짝 놀라기도 했어요. 이 책이 어린이와 청소년이 선정한 올해의 책으로 뽑혀서, 충격을 받았어요. 어린이나 청소년이 읽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왕따 문제와 입시경쟁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어요. 제 책이 너무 무섭다는 이야기도 많았어요.(웃음) 제 의도는 전혀 아니었는데, 죽음 이후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져서 무서웠다는 분들이 있어요. 독자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죽은 자에 대한 관음증적 시선이 느껴진다는 비판적인 리뷰도 있어서 충격을 받았지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책인데 안타깝네요. 저는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절제미’라고 생각했거든요. ‘혼자 고통스럽게 죽은 사람의 집에 가봤더니 이러저러한 모습이 있더라’는 식의 생생한 르포가 아니라, 오히려 죽은 자의 고통은 굉장히 시적이고 상징적으로 압축되어 있고, 그가 남기고 간 소중한 ‘삶의 흔적’을 따스하게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라 좋았거든요. 어쩌면 ‘나는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라는 강한 거부감 때문에 이 책의 진짜 메시지, 즉 죽음의 공포가 아닌 삶의 소중함을 되돌아보자는 의도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가 죽음에 대한 허심탄회한 이야기 자체를 여전히 가로막고 있으니까요. 다음 책은 아마도 그런 독자들의 오해를 풀어줄 수 있는 책이겠지요?

“맞아요. 다음 책에서는 좀 더 보편적인 사랑이야기를 쓰고 싶어졌어요. 죽음에 대한 글보다는 사랑에 대한 글을 써야겠기에, 편지를 쓰고 싶었지요. 아내와 저는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서로 자주 이메일을 보내면서 살았거든요. 말보다는 편지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음 책에 담고 싶어요. 작년에 친구들의 부모님 장례식이 유난히 많았어요. 그 와중에 ‘내가 먼저 떠나면 내 아내는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죽은 자의 마지막 흔적은 항상 외로움의 증거들이었는데, 아내도 혹시나 나를 보낸 뒤 혼자 남겨져서 그런 외로움을 겪지 않을까, 너무 걱정스러웠지요. 죽음 직전의 힘든 시기가 아니라 아직 젊고 건강할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두고 싶어졌습니다.”

―죽음의 문턱이 아니라 건강하고 행복한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남긴다는 것.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죽기 전에야 뒤늦게 떠오르는 생각이 아니라, 생의 한가운데서 내 미래의 죽음을 그려내는 것이 더욱 진솔한 고백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작가님 부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사랑’과 ‘글쓰기’가 아닐까요.

“그런가요.(웃음) 사실 우리 둘 다 평생 문학을 가까이하며 살았기 때문에 글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워요.”

사진/이승원 작가
사진/이승원 작가

죽음 앞에서 조용히 훔치는 눈물

―인터뷰 준비하면서, 김완 작가의 키워드로 ‘문학과 사랑’을 염두에 뒀거든요. 두가지 의미로 그래요. 첫번째는 ‘문학에 대한 사랑’이 작가님 글에서 항상 느껴지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문학으로 이어진 부부의 사랑’이 작가님 인생에서 가장 절실하게 느껴져서요.

“쑥스럽지만, 일리가 있네요.(웃음) 그런데 문학에 대한 제 사랑은 참 복잡해요. 문학을 생각하면 ‘눌어붙은 전골냄비’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너무 오랫동안 가열해서 바닥에 모든 재료가 눌어붙은 전골냄비죠. 전골냄비가 문학판이라면 계속 타오르고 있는 불꽃은 제 마음이지요. 문학에 대한 열정은 학창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지만, 문학권력으로 복잡하게 얽힌 문학판은 이미 오래전에 눌어붙은 전골냄비처럼 가장 향기로운 타이밍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저도 한때는 문학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야망을 접었어요.(웃음) 제가 쓰는 에세이는 ‘비문학’이라고 하더라고요.”

―아프지만 나와 꼭 닮은 동지를 만난 기분이네요. 제 글도 ‘비문학’으로 분류된답니다.(웃음) 예전에 제 글이 고등학교 참고서에 실렸는데, ‘비문학’으로 분류되더라고요. 학교 다닐 때 수필은 분명 문학에 속한다고 배우지 않았나요? 하지만 지금은 소설이나 시만 ‘진짜 문학’이고 수필 혹은 에세이는 ‘문학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사실 소설이냐 시냐 에세이냐보다는 얼마나 우리 가슴을 고동치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 아닌가요. 문학/비문학, 등단/미등단, 작가/평론가, 창작/비평이라는 구분이 왜 그리 중요할까요. 저는 평생 문학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제 글은 ‘비문학’이라고 분류되니까 또 한번 문밖으로 추방당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국문과 대학원에서도 가장 아픈 비난이 ‘너의 글은 문학이 아니다’라는 교수님과 선배들의 지적이었거든요. 문학에 대한 제 사랑은 제도권 안에서는 항상 거부당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제도 밖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나 봐요.(웃음)

“그래요. 저는 정 작가의 지금 이 모습 그대로가 문학적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의 저는 문학의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냥 문인으로 살면 됩니다. 인스타그램 프로필에서 ‘작가’냐 ‘문인’이냐를 선택해야 했는데, 문인을 선택했어요.”

―작가와 문인의 차이가 이럴 땐 중요하군요.(웃음) 저도 문인이라는 말이 더 좋아요. 작가는 음악, 미술 등 다방면을 포괄하지만, 저는 그래도 문장을 쓰는 사람, ‘문학 하는 사람’이고 싶거든요. 작가님의 글도 르포르타주가 아니라 ‘문학’이잖아요. 르포가 객관적인 사실의 글쓰기라면, 문학은 한 사람 고유의 언어와 문체로 지어지는 집이니까요.

“글을 쓰면서 르포르타주가 되는 것을 경계했어요. 르포르타주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쓸 수 있으니까요. 정확하고 객관적인 글쓰기가 르포르타주라면, 제 글쓰기는 메타포를 지향하지요. 메타포는 하나의 지시 대상에 그치지 않고, 작가의 의도조차 뛰어넘어서, 독자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무한히 다양하게 뻗어나가지요. 얼마나 창조적인 메타포를 써서 얼마나 독자를 진정으로 자극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지요. 메타포적 글쓰기의 궁극에는 시가 있지요. 시는 신을 일깨우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종교적인 의미의 신도 있지만, 제가 여기서 말하는 신은 ‘비일상적인 모든 것’이에요. 평소의 나답지 않은 행동도 신이지요. 어떤 독자가 시를 읽다가, 문득 매일 걸어가는 그 길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고, 하늘을 아주 오래 바라보고 싶어졌다면, 그건 문학이 자기 안의 신을 일깨운 것이지요. 시인은 일상 속에서 신을 일깨우는 사람이고, 독자는 시를 읽으면서 자기 안의 숨은 신을 일깨우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글을 쓰고 싶어요. 메타포가 없으면 글쓰는 의의를 못 느낄 정도니까요.(웃음)”

―방금 작가님의 말씀이 ‘메타포 없이는 숨조차 쉴 수 없다’는 의미처럼 들렸어요.(웃음) 아름다운 글들은 모두 그 안에 끝없이 다채로운 의미의 파장으로 울려 퍼질 수 있는 메타포를 품고 있으니까요. 메타포를 꿈꾸는 글쓰기, 시적인 글쓰기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저마다의 신을 이끌어내는 작업이기도 해요. 작가님의 글에는 시적인 은유가 반짝이는 순간이 많아요. 스스로 삶을 마감한 젊은 여성의 집을 청소하는 장면을 읽고 울었다는 분들이 많아요. 이런 장면들이 바로 문학작품 속의 ‘그’가 바로 ‘나’임을 깨닫는 순간이지요.

이 세상에 캠핑을 온 것처럼 실로 간단한 살림을 꾸리면서도 그녀의 곁을 지켜준 책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참 소중한 너라서> <행복이 머무는 순간들> <아주, 조금 울었다> <내 마음도 모르면서>…. 누군가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했다면 스스로 삶을 저버리겠단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어느덧 서른을 맞이하고, 소중한 ‘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가끔은 울기도 하겠지만 행복한 시간 속에 머물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 내 마음도 모르면서, 내 마음도 모르면서…. 그녀 마음의 아주 사소한 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는 동료가 알아채지 못하게 눈물을 훔치고 책들을 서둘러 자루에 쏟아부었다. ―<죽은 자의 집 청소> 중에서

사진/이승원 작가
사진/이승원 작가

살았을 때, 누군가에게 사랑받던 이들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는 것을 서구에서는 ‘트라우마 클리닝’이라고 부른다고 하셨는데요. 끔찍한 시체를 비롯한 여러 무시무시한 광경을 바라보는 남겨진 자들의 고통을 줄여주자는 의미도 있지만, ‘트라우마 클리닝’이라는 이름 자체가 시적인 메타포 같아요. 트라우마는 자존감을 잃어버리는 순간, 존엄을 빼앗기는 순간 발생하는 아픔이잖아요. 죽은 자의 마지막 흔적을 청소하고 유품을 정리함으로써 작가님이 지켜내는 것은 모든 삶의 존엄이 아닐까 싶었어요. 홀로 남아 죽어간 사람의 집을 청소하면서 작가님이 발견하신 것은 결국 고인이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받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이라는 점도 감동적이었어요.

“청소를 하면서 우연히 그분들의 이름, 학교, 직장 등의 흔적을 발견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세상을 떠난 분들의 진실은 주소나 이름이나 직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향한 살아 있는 사람의 사랑’이지요. 죽어간 사람들, 그들 모두는 함부로 비판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 누군가에게 사랑받던 사람입니다.”

―정말 그래요. 청소가 정화의 작업도 되지만 우선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청소는 내 삶의 운전대가 내 손에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거든요. 내 방 청소를 남에게 맡기기 꺼려지는 이유도 삶의 통제권을 남에게 넘겨주는 기분이 들어서였어요. 오늘 아침에 저도 피아노 의자 위에 잔뜩 올려진 책들을 치우고 비로소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고 왔거든요. 피아노 위를 싹 치우자 기분이 정말 좋더라고요. 그런 간단한 청소만으로도 사람의 기분이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해요. 땀 흘려가며 싱크대 개수구나 화장실 청소를 싹 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엄청난 해방감이 느껴지고 그 마음의 여백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요.

“맞아요. 청소는 다른 일에서는 찾기 어려운 해방감을 줘요. 수많은 직업 가운데 하필 청소를 택한 이유도 바로 그 해방감 때문이지요. 사람이 살기 힘들 정도로 어지럽거나 지저분한 공간을, 벽지와 장판까지 다 뜯어내고 오로지 시멘트 벽만 남겨두었을 때, 엄청난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껴요. 청소와 글쓰기는 묘하게 닮은꼴입니다. 글쓰기도 끝없이 덜어내는 작업이거든요. 장식과 취향을 드러내는 모든 집기와 가구를 제거하고 오로지 벽만 남겨두는 청소처럼, 글쓰기도 모든 장식을 제거하고 최소한의 문장만을 남겨두는 거예요. 덜어냄으로써 여백이 생기고, 여백 위로 새로운 삶의 씨앗이 움틀 수 있어요.”

사진/이승원 작가
사진/이승원 작가

떠난 이의 존엄을 기린다는 것

그는 자신의 일이 그저 남들이 기피하는 험한 일이 아니라 죽은 자의 존엄을 기림으로써 삶 자체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사랑의 요청’임을 안다. 특수청소를 하다 보면 온갖 무리한 요구와 무례한 사람들 앞에서 놀랄 때가 많다. 하지만 그는 상대가 아무리 무례해도 화내지 않는다. 그 무례함 뒤에 ‘혹시 이 청소를 망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숨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타인의 무례함과 공격성 뒤에 숨은 ‘사랑의 요구’를 포착할 줄 아는 그의 무진장한 따스함이 마음을 울린다.

이 강인함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삶 자체의 디폴트값이 ‘고통’임을 가만히 받아들이는 자 특유의 차분함, 그 뒤에는 사실 ‘유머’와 ‘사랑’이 있다. 아내의 이야기,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샴고양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의 얼굴엔 장난기 어린 미소가 번진다.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시처럼 간결하고, 그가 견뎌온 고통의 페이지들은 수백편의 소설을 콜라주로 이어 붙인 듯 다채로운 울림으로 가득하다. 그는 시를 쓰고 싶지만 아내가 자신의 소설을 더 보고 싶어 하므로 우선 소설부터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다. 인터뷰가 끝난 뒤 나와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노을 속으로 아스라이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혼자 걷는 사람의 뒷모습이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가 밤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피로나 관성 때문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 때문임을 알기 때문이다.

작가. 개성 넘치는 존재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꿈과 일상과 배움의 열정을 나누는 곳, 그곳이 바로 살롱이지요. 작가 정여울이 이 시대의 빛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속 깊은 정담을 나누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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