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에는 폭력과 혐오의 세상에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낙관으로 고군분투하는 ‘호프펑크’ 사조가 존재한다. 넷플릭스 화면 갈무리
“호프펑크(Hopepunk)에 대해서 한번 써보면 어때요?” 동료 작가가 내게 칼럼 주제를 제안했을 때, 나는 처음 듣는 단어 앞에서 움찔했다. “호프펑크가 뭔가요?” 한국어 기반 온라인 문서 중에는 호프펑크라는 키워드로 검색에 걸리는 글이 없었다. 동료는 내게 조용히 호프펑크에 대해 다룬 영미권 언론 기사를 보내주었다.
호프펑크가 무엇인지 설명하려면 그 반대항인 ‘그림다크’(Grimdark)부터 설명해야 한다. 에스에프(SF) 전략게임 시리즈인 <워해머 40000> 캐치프레이즈인 “음울한 암흑에 휩싸인 머나먼 미래, 그곳엔 오직 전쟁만이 있으리라”(In the grim darkness of the far future, There is only war)에서 기원한 신조어 ‘그림다크’는, ‘세계를 향한 비관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불신, 허무주의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폭력의 굴레’와 같은 세계관을 지닌 작품, 또는 그러한 사조를 뜻한다. 원래 <워해머 40000>의 팬픽션에 자주 쓰이던 이 단어는, 2000년대 후반 무렵부터 <워해머 40000> 팬덤을 넘어 이와 같은 어두운 설정을 지닌 작품들에 더 폭넓게 적용되기 시작했다. 꿈도 희망도 없는 권력다툼과 살육을 담아낸 지극히 현실적인 판타지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나, 마약 산업에 발을 들였다가 철저히 망가져가는 인간 군상의 삶을 소름 끼치도록 어둡게 그려낸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 같은 작품들을 설명할 때에도 그림다크라는 장르명이 호출되었다. <오징어 게임> 또한 극한 상황에 몰린 인간들은 모두 이기적인 본성을 드러내며, 선의를 보여준 이들은 전부 배신당한다는 설정으로 인해 ‘그림다크하다’는 평을 받았다.
돌이켜 보면 비관과 불신, 체념과 허무주의의 정서는 2000년대 이후의 세계를 정직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미국은 21세기의 시작을 9·11 테러로 맞이했고, 세계는 다시 신냉전의 시대로 회귀했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전세계적으로 저성장과 양극화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 ‘양극화의 세계화’는 갈수록 극심해져서 상위 1%의 인구가 지구 전체의 절반에 달하는 부를 독점하는 형태로 고착됐다. 성장을 위해 기후위기를 끊임없이 부정했던 사람들은, 전세계에서 기후위기의 징후들이 현재형으로 발생하기 시작하자 은밀하게 “어차피 돌이킬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쳤다”며 사람들을 체념하게 만드는 선전전에 돌입했다. 이런 세계에서, 세계의 내일을 비관하고 인간의 본성을 불신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반대항인 ‘호프펑크’가 등장한 건 2017년 7월이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활동하는 작가 알렉산드라 롤런드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두줄짜리 포스트를 올렸다. “그림다크의 반대말은 호프펑크입니다. 주위에 전달하세요.” 5만개가 넘는 댓글이 달린 그 포스트에서부터, 호프펑크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세계의 구체적인 그림이 자라났다. 세계를 향한 비관과 불신에 체념한 채 냉소와 폭력으로 맞서는 쪽을 선택하는 그림다크 사조와 달리, 호프펑크 사조는 낙관적인 희망을 가지고 친절과 부드러움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 낙관은 세상을 향한 순진한 인식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그림다크가 그렇듯 호프펑크 또한 세계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세계는 폭력과 압제, 차별과 혐오가 가득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여전히 ‘함께 싸우면 세상은 나아질 것이다’라는 낙관과 새로운 세계를 향한 급진적인 희망, 서로를 향한 친절, 부드러움과 유머를 버리지 않는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 호프펑크의 사조인 것이다. 호프펑크는 세상에는 설령 영원한 승리로 끝나진 않을지라도 계속해서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이 있고, 그 싸움의 무기는 선의를 잃지 않은 사람들의 협력과 친절함이며, 냉소와 허무, 혐오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 친절함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강인하고 급진적인 정치적 선택이라 말한다. 뭘 잘 몰라서 세계를 꽃밭으로 보는 순진한 낙관이 아니라, 세계가 온통 자갈밭임을 알면서도 그 위에 펼쳐질 꽃밭을 상상해내고는 웃으며 자갈을 치우는 강인한 낙관의 세계가 바로 호프펑크다.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한 장면. 웨이브 화면 갈무리
단어만 낯설지, 호프펑크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야기다. 우리에겐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젤리’들과 싸워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음에도, 좌절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구할 수 있는 학생들을 구하며 친절을 베푸는 보건교사의 이야기를 다룬 정세랑 작가의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2015)이 있었다. 정치권을 둘러싼 온갖 스캔들과 물밑에서 일어나는 정략, 여성혐오와 관료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기구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의 선의를 그린 웨이브 오리지널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2021)가 있었다. 전학 가는 학교마다 왕따를 당하고 믿었던 이들에게 속기를 반복하며 좌절하지만, 그럼에도 학우들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추리반의 모험을 그린 리얼리티 추리쇼 티빙 <여고추리반>(2021~)이 있다. 비록 <오징어 게임>이나 <지금 우리 학교는>(2022)처럼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이 어디까지 이기적이 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디스토피아 장르의 열풍 때문에 잠시 낯설게 느껴질 뿐, 우리에게도 끈질긴 낙관과 부드러움으로 세계의 어둠과 맞서 싸우는 호프펑크의 사조가 존재한다.
정치의 계절이 짙어지고 코로나19 대유행이 정점으로 치닫는 시기, 한국 사회는 서로를 향한 혐오와 불신을 잔뜩 세운 이들로 가득하다. 우리의 광장은 어느새 이방인을 손가락질하고, 여성과 장애인, 성적 소수자의 권리 추구를 ‘생떼’로 몰아세우고, 계급적 차이를 보정하기 위한 각종 장치(행복주택, 기회균등전형,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를 ‘공정’한 게임의 룰을 해치는 무임승차라 비난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시대를 향한 환멸과 냉소를 선택하기 너무 쉬워진 시대, 어쩌면 이 시대를 무사히 건너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체념이 아니라 호프펑크인지 모른다. ‘친절과 부드러움, 세상을 향한 끈질긴 낙관’을 주문처럼 외우는 호프펑크 사조의 작품뿐 아니라, 그 태도를 내 삶으로 가져오는 호프펑크적인 실천까지도.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