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초 가나아트센터 100세 개인전을 앞두고 서울 평창동 화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김병기 화백이 대표작이된 신작 <공간반응>에 대해 설명하던 모습이다. 노형석 기자
20세기와 21세기를 화폭과 인생에 함께 그렸던 106살 현역 화가가 이승을 떠났다.
김병기 화백. <황소>를 그린 국민화가 이중섭과 리얼리즘 회화의 거장 이쾌대, 푸른빛 점화의 거장 김환기 등과 친구 사이로 동고동락했던 국내 최고령 작가이자 지난 세기 한국 근현대사의 유일한 산증인으로 남았던 그가 지난 1일 오후 9시30분 경기도 장흥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106.
고인은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1950~60년대 한국 추상미술의 여명을 밝힌 1세대 화가다. 서울대 미대 교수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지내며 해방 이후 미술계의 제도적 기반을 다진 교육가·행정가로도 업적을 남겼다. 별세하기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그는 한·중·일 화단 통틀어 100살 넘은 희귀한 현역작가였고, 21세기에 지난 세기 한국과 일본의 문화예술 교류사를 증언한 유일한 증인이었다.
1916년 평양 제일의 갑부 가문에서 태어나 한국과 일본, 미국을 오가며 펼쳐진 그의 미술 인생은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106살 최고령 현역’이었던 고 김병기 화백은 지난달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지난 1월 23일 찍은 고 김병기 화백의 마지막 사진. 유족 제공
부친은 1917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해 고희동, 김관호와 더불어 국내 양화 화단의 기틀을 놓은 선구자이자 고미술품 수집가로 유명했던 김찬영(1889~1960)이었다. 유년시절 그는 평양 집 안에 널린 부친의 화집과 미술잡지, 화구, 습작한 그림들을 보면서 인상파 등의 서구 문예사조에 눈 떴다. 화가 이중섭은 평양 종로보통학교 같은 반 동창으로 서로 집을 오가면서 함께 화가의 꿈을 키웠다. 열여섯살에 처음 어머니가 사준 화구를 들고 그림을 그린 그는 부친을 이어 화가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1933년 일본 유학을 떠났다.
김 화백은 당시 일본 화단의 최고 총아였던 스타화가 후치타 쓰쿠하루가 세운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와 일본 문화학원에서 수학했다. 체질적으로 새롭고 전위적 흐름을 좇았다는 청년 김병기는 당시 유학 온 문학수, 유영국, 이중섭, 김환기는 물론 쓰다 세이쥬 같은 당대 일본 문화예술계 소장 인사들과 교유하며 추상주의·상징주의 성향의 그림 창작과 비평 활동에 진력했다. 1936년 건강이 피폐해져 일본으로 온 이상을 자신의 하숙집에서 재워주고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유학 시절 화집을 같이 보고 즐겨 토론하는 사이였던 이중섭, 김환기와의 교분은 1939년 귀국 뒤에도 이어져 성북동 김환기의 집에서 수시로 모여 의기투합하며 조선 화단의 미래를 구상했다.
2016년 12월말 서울 평창동 화실에서 <한겨레> 회고록 ‘길을 찾아서’ 연재를 위해 구술 중인 김병기(왼쪽) 화백과 집필을 맡은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김경애 기자
해방 직후엔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송진우와 조만식 등 두 지역 정계 인사들을 연락하는 밀사 구실을 도맡았고, 월북화가 이쾌대·문학수 등과도 만나면서 조선 화단의 정비와 개편을 위해 진력했다. 고향 평양에서 문화예술협회를 꾸렸다가 이후 북한 정권 주도로 생긴 조선문화예술총동맹 서기장을 맡았다. 평양시군중대회에 모습을 처음 드러내기에 앞서 청년 김일성이 그를 불러 초상화를 ‘’청탁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선전미술을 채근하는 북한 정권의 압박에 1947년 월남해 국방부 한국문화연구소에서 반공선전활동을 하다 1950년 초 ‘50년미술협회’를 결성해 좌우작가 합작운동도 벌였다. 한국전쟁 발발 뒤엔 피난을 못 가고 인민군 치하 서울에서 의용군으로 끌려갈 뻔하다 탈출하는 등 생사를 넘나드는 곡절을 겪었다.
1951년 30대의 김 화백은 피난 수도 부산에서 종군화가단 부단장으로 활동한다. 부산항 부두에서 방황하던 이중섭 가족을 발견해 거처를 알선해주고 종군화가단에 가입시켜 생계를 잇게 해준 것이 그즈음이었다. 당시 거장 피카소가 미군의 양민학살을 고발한 대작 <조선의 학살>(1951)을 그려 논란을 일으키자 이 작품이 전쟁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피카소와 결별을 선언하는 편지 낭독회를 열어 일약 유명세를 탔다. ‘강단에서 예술을 논해보라’는 서울대 쪽의 권유로 전쟁 직후 서울대 미대 교수가 된 그는 많은 평론 글을 <사상계> 등에 발표했다. 한국 추상미술의 발생과 전개 양상을 정리한 당시 그의 논문과 비평 글들은 한국현대미술사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요즘 미술시장에서 주목받는 박서보, 김창렬, 정창섭 같은 추상미술 원로작가들이 1950년대 청년시절 ‘반국전’을 표방하면서 전위미술 운동을 벌일 때는 배후의 지원자 구실을 맡았던 이도 김 화백이었다.
고 김병기 화백이 지난해 9월말 경기도 장흥 자택에서 <대한민국예술원 미술전>에 선보일 200호짜리 대작을 그리고 있다. 고구려 벽화를 단순추상화한 도상에 전통 오방색을 입혀 코로나 감염병에 대한 '저항'의 의지를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사진 김경애 기자
지난해 12월 열린 <대한민국예술원 미술전>에 출품한 김병기 화백의 2편 연작 가운데 ‘저항-서백호’. 대한민국예술원 제공
지난해 12월 열린 <대한민국예술원 미술전>에 선보인 김병기 화백의 2편 연작 가운데 ‘저항-동청룡’. 대한민국예술원 제공
서울대 미대 교수에 이어 서울예고 설립을 주도해 미술과장을 지낸 그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으로 일하다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작품에만 전념하겠다”면서 미국에 남았다.
그 뒤 20년간 미국 동부에서 은둔하면서 형상성이 녹아든 추상회화를 갈고 닦았던 김 화백은 1986년 윤범모 평론가의 기획으로 첫 귀국전을 열었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김병기:감각의 분할>은 작가를 국내 화단에 온전히 복귀하게 한 전기가 됐다. 뒤이어 2016년 <100세전>에 이어 2019년에도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지난해에도 신작을 출품한 그는 최근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왔다. 2017년 101살에 대한민국예술원 최고령 회원으로 선출되는 기록을 세웠고, 지난해엔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데 이어 연말 열린 대한민국예술원 미술전에도 출품해 코로나 감염병에 대한 저항의지를 표현한 추상회화 신작을 발표했다.
고인은 생전 <한겨레>와 한 인터뷰를 통해 인생의 첫 절반은 남북한에서, 나머지 절반은 미국에서 갈고닦은 자기 화풍을 ‘추상성을 통과한 뒤에 나온 형상성 ’으로 요약했다. 서구 모더니즘 미술이 20세기 말 형식주의에 치중해 정신성을 잃었으니 100살 작가의 연륜에 맞게 노장사상 등의 영감을 얻어 이를 복원하는 게 전인미답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는 소신이었다. 실제로 1970년대부터 작가의 화면에 드러난 형상성은 한국과 미국에서 맞닥뜨렸던 현실 풍경을 선과 색의 역동적 교차와 율동으로 담아낸 것이다. 한국 사회와 군중의 모습을 극도의 추상화된 선으로 형상화한 신작 <공간 반응>(2016)은 이런 양상을 힘차게 붓질한 검은 빛의 화폭과 여백으로 표현한 말년 대표작이다.
장강의 물줄기 같은 역사적 기억들을 안은 그의 인생사는 2017년 <한겨레>에 ‘길을 찾아서-한 세기를 그리다’란 제목으로 1년간 윤범모 미술평론가(현 국립현대미술관장)가 집필한 구술 회고록으로 연재됐다. 이듬해 <백년을 그리다>란 제목의 책(한겨레출판)으로 나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난 2016년 인터뷰 당시 김 화백이 60여년 전 행려병자로 무연고 처리될뻔한 친구 이중섭의 유해를 손수 병원에서 찾아 화장했던 일화를 들려주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미리 남긴 유언과도 같다. “예술은 인생처럼 언제나 진행 중이고 미완성입니다. 완결이란 담벼락 그림처럼 전락하는 겁니다. 저는 끊임없이 보충하고 변화시키는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유족으로 아들 청익(재미사업가)·청윤(조각가), 딸 주은·주량·주향, 며느리 백혜란(재미 화가)·오정희(화가)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4일 낮 12시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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