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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에서 연락이 왔다.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 출발 시간이 두시간 당겨졌다고 한다. 그런데 도착 시간은 그대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 영공을 지나가는 것이 어려워져 다른 항로로 돌아가야 한다. 생각해보니, 30년 전만 해도 중국과 소련의 하늘을 우리 비행기가 지날 수 없었다. 그때는 유럽에 갈 때, 미국 알래스카주 앵커리지를 거쳐 북극을 넘어서 갔다. 앵커리지에서 먹었던 우동 맛을 아직도 기억하니 추억이라 할 수도 있지만,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70년 전 이야기이고 세계대전은 그 이전 이야기이다. 핵무기까지 사용되었던 비극의 상처는 크고 깊어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도 단단하지만, 시간의 두께에 희미해져가는 것일까? 아트 스피걸먼의 만화 <쥐>의 뒤표지에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지금 전쟁이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있는 그곳에서 80년 전에도 비슷한 비극이 있었다. <쥐>에는 그때 이야기가 담겼다. 뉴욕에 사는 아트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아버지 블라덱의 이야기.
아트 가족의 역사에는 전쟁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아트 할아버지는 러시아 군대에 징집되어 시베리아에서 25년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이가 12개 빠지면 제대시켜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14개를 빼고 도망쳤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블라덱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안간힘을 써도 피할 수 없었던 군대에서, 블라덱은 혼란스럽다.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총을 쏘아야 하는지 모르던 그가, 총을 쏘지 않으면 차가운 총신 때문에 같은 편 상관에게 혼쭐이 난다. 쏘지 않으면 구타를 당하니 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람을 죽인다. 되도록 허공에 대고 총을 쐈건만, 포로로 잡힌 뒤에는 총신이 뜨겁다고 구타당한다. 포로들은 모두 동상에 걸리고 상처에는 고름이 고였다. 고름 자리엔 이가 우글거렸다.
포로에서 풀려난 뒤, 민간인으로 휩쓸린 전쟁도 나을 것은 없었다. 전쟁 중에 고통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블라덱은 유대인이라 그 고통은 더 컸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실리를 찾아가고 죽을힘을 다한다. 서로 살겠다고 벌이는 배신이 난무하니 정신을 바짝 차리지 못하면 골로 가기 십상이다. 가족들이, 친구들이 하나씩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끌려가고 지배자에게 자신이 유용한 존재라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지 않으면 죽는다. 아트가 보기에, 거기서 살아남은 블라덱은 ‘늙은 구두쇠 유대인 인종차별주의자’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그를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까?
뉴욕 레고파크에서 친구들과 놀던 아트의 롤러스케이트 끈이 끊어졌다. 기다려달라고 했건만 친구들은 꼴찌라고 놀리며 두고 가버렸다. 눈물을 훔치며 아버지의 작업실을 찾은 아트에게 블라덱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친구? 네 친구들? 그 애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 전쟁의 참화는 인간성을 말살하고 모든 꿈을 물거품으로 만든다. 그런 세상에서 살 수 없다. 전쟁을 멈춰라!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