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티비시>(JTBC) 새 음악예능 <뜨거운 씽어즈>에서 노래하는 나문희 배우. 제이티비시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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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쯤 전이었나. <제이티비시>(JTBC) 새 음악예능 <뜨거운 씽어즈>의 첫 홍보 영상이 나온 직후 내 주변 사람들의 인사말은 모두 이것이었다. “혹시 나문희 선생님 노래하는 거 봤어요?” 그럴 법도 했다. 나문희는 언제나 보는 사람을 먹먹하게 만드는 명배우지만, 홍보 영상 속 나문희는 거의 반칙 수준이었다. 무대 위에 올라 조덕배의 ‘나의 옛날이야기’를 한음 한음 조심스럽게 부르는 나문희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붉어지는데, 심지어 예고편은 장현성, 서이숙 같은 후배 배우들이 나문희의 무대를 보며 눈물을 훔치는 장면도 같이 보여준다. 김문정 음악감독조차 눈물을 훔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그런 감동, 어떻게 노래했길래
도대체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었길래 이렇게 무시무시한 홍보 영상이 나온 걸까. <뜨거운 씽어즈>는 김영옥, 나문희, 장현성, 서이숙처럼 노래를 좋아하지만 업으로 삼아본 적은 없었던 배우들, 늘 음악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정작 노래를 배워볼 기회는 없었던 전현무, 천둥 같은 성량을 자랑하지만 그 탓에 사람들과 화음을 맞출 기회보단 혼자 노래하는 순간이 더 많았던 가수 권인하 등의 연예인들을 모아 합창단을 만드는 예능이다. 시놉시스만 보고 “옛날에 <한국방송>(KBS)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에서 합창단 했을 때랑 비슷한 기획인 거 아니야?”라고 시큰둥하게 반응하던 사람들조차, 일단 나문희의 무대를 보고 난 뒤에는 말을 아꼈다. 나문희는 그만큼 힘이 셌다.
프로그램이 첫 방영을 하기 전에는 모두가 나문희의 무대를 이야기했다면, 지난 14일 첫 방영을 하고 난 뒤에는 모두가 입을 모아 김영옥의 무대를 이야기했다. 임형주가 번안해 불러서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노래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부르는 김영옥은 분명 버거워 보였다. 원곡 자체가 쉬운 노래가 아니라서, 음정은 떨렸고 호흡은 자주 끊어졌다. 아주 잘 부르는 노래라고는 할 수 없는 무대였는데, 그럼에도 보는 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닦기 바빴다. 여든여섯의 배우가 ‘나는 죽은 게 아니라 바람이 되어 당신 곁을 지킬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는데, 감정이 울컥하지 않기란 힘든 일이니까. “살면서 먼저 이별해야 했던 가족들을 생각했다”는 김영옥도 솟구치는 감정을 조심스레 억눌렀다. “칭찬은 집에 가서 들으시면 된다”며 아쉬운 점을 적극 지적하겠다고 했던 김문정 음악감독조차 “음악적인 요소와 이야기가 결합했을 때 보여줄 수 있는 힘을 보여주셨다”며 감탄했고, 앞으로 함께 만들어나갈 추억이 기대된다며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제이티비시>(JTBC) 새 음악예능 <뜨거운 씽어즈>에서 노래하는 김영옥 배우. 제이티비시 화면 갈무리.
물론 이날 <뜨거운 씽어즈> 첫 방송에서 노래를 부른 사람들이 나문희와 김영옥 둘만은 아니었다. 배우 서이숙, 김광규, 장현성이 차례로 무대 위에 올라 자신이 직접 골라온 노래들을 선보였는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자기소개 삼아 노래하는 배우들의 무대는 다들 힘이 셌다. 그런데 그 많은 무대 중 나문희와 김영옥의 무대가 유달리 더 많은 화제를 모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누군가는 나문희와 김영옥이 살아왔던 인생이 노래 위에 투영되어 유달리 울림이 컸을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나문희와 김영옥이 살아온 개개인의 인생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두 사람의 삶과 공명해서 울컥했다고 하기엔, 우리가 그들의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지식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혹자는 노래 또한 무대예술이니 연기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며, 60년 넘게 연기를 펼쳐온 대가들이 노랫말에 담긴 메시지를 경지에 오른 표현법으로 더 묵직하게 표현해냈기에 깊은 감동을 받은 게 아니겠냐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야기하기엔, 두 사람은 보는 사람이 걱정할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무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나문희의 모습을 보며 잘 모르는 사람들은 “긴장도 안 하신 것 같다”고 이야기했지만, 오랫동안 그를 근거리에서 지켜봐왔던 이들은 “긴장해서 일부러 더 빨리 간 것”이라며 그 긴장감을 간파했다. 두 사람은 자신이 무대 위에서 실수하지는 않을까, 서툰 노래 실력이 폐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손을 덜덜 떨었고, 무대를 마무리한 뒤에도 그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두 사람의 무대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훌륭한 무대였지만, 그 무대들을 나문희와 김영옥이 지닌 연기자로서의 기량이 발휘된 무대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마도 결례일 것이다.
서툰 진심이 흔들어버린 마음
어쩌면, 오히려 기술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무대여서 더 마음이 갔던 건 아니었을까? 영화와 드라마에서 누구보다 빛나는 연기로 우리의 마음을 훔쳤던 어르신들이, 전에 없이 긴장한 모습으로 한음 한음 정확하게 부르려고 안간힘을 쓰며 노력하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새로우니까. 그 서투름이 애틋하고, 간절함이 울컥하고, 노랫말을 잘 전달하고 싶어 하는 진심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던 게 아닐까?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국민 배우’들의 새로운 도전을 볼 때,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다른 면모를 보고 싶어지고 더 알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건 우리가 은연중에 품고 있었던, 기성세대와 더 잘 소통하고 싶다는 욕망이 반영된 건지도 모른다. 나문희의 노래에서 우리는 나문희만 보는 게 아니라, 그를 프리즘 삼아서 나의 어머니, 혹은 나의 할머니를 떠올리고 바라본다. 그들과 더 잘 소통하고 싶다는 욕망을 나문희와 김영옥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흔히 한국을 세대 갈등이 심각한 나라라고 한다. 실제로 워낙 짧은 시간 동안 압축성장을 겪으면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이 빠르게 변화해온 탓에, 한국 사회는 세대 간의 동질성보다 이질성이 더 크게 강조된 면이 있다. 한국전쟁을 경험해 반공주의를 체화한 기성세대와 민주화 투쟁을 했던 586세대, 전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며 그런 선배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엠제트(MZ)세대들까지, 세대 갈등을 이야기하는 뉴스만 보면 한국은 서로를 늙었다고 조롱하고 어리다고 무시하는 이들로 가득 찬 것만 같다. 하지만 어쩌면 서로에게 말을 걸어볼 핑계가 없어 쭈뼛쭈뼛하고 있을 뿐, 마음속 깊은 곳엔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마음들이 있는 게 아닐까? 나문희와 김영옥의 무대에 눈물을 훔치며 생각한 건 그런 것들이었다.
이승한 |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