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배우 윌 스미스(오른쪽)가 행사를 진행하던 크리스 록을 때리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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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다큐멘터리 상을 시상하러 무대 위로 올라온 코미디언 크리스 록은 삭발을 하고 시상식에 참여한 제이다 핑킷 스미스를 향해 농담을 던졌다. “제이다! <지.아이.제인 2> 기대하고 있어요!” 여성 정보장교가 미 해군 ‘네이비 실’에 입소한다는 내용의 영화 <지.아이.제인>(1997)은, 촬영을 위해 데미 무어가 삭발을 감행한 것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그러니 삭발이 그저 스타일링의 일환이었다면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농담이었을 것이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편 윌 스미스도 처음엔 웃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제이다 핑킷 스미스가 삭발을 한 이유가 탈모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맥락은 다소 복잡해진다. 흑인의 모발은 아프리카 대륙의 무더운 기온에 적응하기 위해, 체내 수분 배출을 최소화하고 열기를 잘 배출하는 구조로 진화했다. 그래서 백인이나 아시아인에 비해 모발의 굵기가 얇고, 그 수가 적으며, 자라는 속도도 느린 편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선 이상적이었을 흑인들의 모발은, 이들이 노예 무역을 통해 전혀 다른 대륙으로 끌려가 서구 백인들의 미감을 강요당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수난을 겪기 시작했다.
찰랑이는 긴 생머리를 선호하는 백인들에게 곱슬거리는 흑인들의 머리카락은 오랜 세월 조롱과 비하의 대상이었다. 수많은 흑인 여성들은 주류 사회로부터 존중을 받기 위해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전기 인두로 펴서 직모를 연출했다. 전기 인두로 편 직모의 반대 방향에는 흑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스타일링이 있다. 흑인의 곱슬거리는 모발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아프로’나, 손질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엉클어진 모발 상태를 유지하는 ‘드레드록’, 머리카락을 복잡한 기하학적 형태로 두피에 바짝 붙여서 여러 갈래로 땋는 ‘콘로’ 스타일 등은 백인들이 강요한 대로 살지 않겠다는 일종의 저항이자 문화 운동이었다.
안 그래도 상대적으로 연약해서 온갖 손상에 시달리는 흑인들의 모발은, 전기 인두로 펴거나 엉킴 방지를 위해 땋는 과정을 반복하며 심각하게 손상된다. 특히 상대적으로 짧은 머리를 유지하며 스타일링에 공을 덜 들여도 되는 남성과 달리, 긴 머리를 유지해야 하는 여성들은 종종 심각하게 탈모증을 겪는다. 여기에 남성의 탈모에 비해 여성의 탈모에 더 가혹한 미적 기준까지 적용되면서, 흑인 여성들은 자존감을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자기모멸에 빠진다.
제이다 핑킷 스미스 또한 탈모로 인해 오래 고통받았고, 그 사실을 여러차례 공개석상에서 호소한 바 있다. 그의 삭발은 탈모로 인한 피치 못한 선택이었던 건데, 전세계가 보는 자리에서 자신의 헤어스타일을 공개적으로 조롱당한 것이다. (크리스 록은 제이다 핑킷 스미스가 탈모증인 것을 몰랐다고 밝혔지만, 작가 록산 게이는 흑인 여성의 모발에 관한 다큐멘터리 <굿 헤어>를 제작했던 크리스 록이라면 최소한 그 농담이 무례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리라 지적했다.) 그리고 제이다 핑킷 스미스가 상처받은 표정을 짓자,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그 일이 벌어졌다.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윌 스미스가 돌연 무대 위로 올라가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리고는 욕설을 섞어가며 “내 아내 이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라”고 소리친 초유의 사건.
사건 초기 한국에서는 “아내가 모욕당했는데 남편이 나설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속 시원해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분위기는 빠르게 정리되는 중이다.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유명인으로서 농담의 대상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인데, 이에 물리적 폭력으로 대응한 것은 쇼 비즈니스의 문법으로 보나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으로 보나 그 어떤 기준으로도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아카데미 위원회는 윌 스미스를 어느 수위로 견책하면 좋을지 조사에 들어갔고, 윌 스미스는 시상식 다음날 크리스 록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함께 참석한 윌 스미스와 아내 제이다 핑킷 스미스. UPI 연합뉴스
당연히 윌 스미스의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만약 이를 용인한다면 우리는 상대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이유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잘못된 시그널을 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윌 스미스의 폭력을 단호하게 규탄하고 난 뒤에도 질문은 남는다. 과연 어떤 대처가 효과적이었을까 하는 질문 말이다. 흑인 여성의 유달리 높은 탈모증 비율이 인종차별과 성 고정관념이라는 맥락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크리스 록의 농담은 ‘서구 사회 내 흑인’과 ‘남성 중심 사회 내 여성’이라는 두가지 중첩된 소수자성을 향한 조롱이었다. 성별이나 피부색, 출생지, 장애나 질병처럼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소수자성에 대한 공격이 ‘농담’의 외피를 입고 가해질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혹자는 스미스 부부가 크리스 록의 농담이 부적절했으며 상처를 받았다고 입장을 밝히기만 했어도 크리스 록이 엄청난 비판에 직면했을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크리스 록이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시아인들을 향한 인종주의적 농담을 던졌을 때에도 ‘엄청난 비판’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아시아계 유명인사들을 비롯해 그의 농담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없진 않았으나, 그 비판의 대부분은 ‘농담을 농담으로 받을 줄 알아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상쇄됐다. 또한 ‘유명인사라면 농담을 받아낼 줄도 알아야 한다’는 쇼 비즈니스 문법을 생각하면, 농담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는 쪽이 도리어 ‘옹졸하다’고 역풍을 맞았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부당한 조롱조차 농담으로 넘기라며 웃음을 강요당하는 상황을,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 게 최선이었을까?
물리적 폭력이 대응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것을 옹호했다간 우리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폭행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윌 스미스의 폭력을 단호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논의를 “사람이 사람을 때려선 안 된다”에서 끝내는 순간, 그날 무대 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의 맥락은 납작하게 소거된다. ‘사람을 때린다’와 ‘아프지만 기품 있게 웃어넘긴다’ 사이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저항의 언어는 무엇이 있을지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그것도 시급하게.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